독서 DNA, 골수에 박힌 독한 유전의 힘

by 해림

나의 유년 시절, 집안엔 늘 책이 있었다.

먹고살기 팍팍했던 그 시절에 다른 집에서는 좀체 찾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신문기자였던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지시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을 때도, 어머니는 자식들의 손에 책을 쥐여주는 일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악착같이 공부해 교사가 되셨던 인텔리 어머니는, 독서의 힘이 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지 몸소 체험하며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 덕분일까. 우리 형제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내며 반듯하게 성장했다.


부모가 되어 두 딸을 키울 때, 나 역시 독서 교육만큼은 결연한 자세로 임했다. 큰딸이 고개를 가누기 시작할 무렵부터 전집을 들였고, 바쁜 엄마를 대신해 카세트테이프가 들려주는 동화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다독자였던 큰딸에게 책은 세상을 이해하는 거대한 통로였다. 때로는 숙제도 팽개치고 독서에만 빠져 내게 혼이 날 정도였다.


반면 작은딸은 아주 까다로운 독자였다. 기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부하고, 반드시 엄마나 고모가 곁에서 설명을 곁들여 읽어줘야 직성이 풀렸다.


한 페이지라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모르는 게 나올 때마다 멈춰 서서 질문을 쏟아내던 그 집요함은, 훗날 상급 학교로 진학할수록 최고의 학습법이 되어 아이를 무서운 우등생으로 만들었다.


독서의 힘은 입시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언어영역 문제 앞에서도 두 딸은 특별한 학원 공부 없이 늘 최고 등급을 받아냈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그 이후에 찾아왔다. 이제 엄마가 된 큰딸은 퇴근길, 품 안에 묵직한 동화책 뭉치를 안고 나타난다. 자신의 직장 인근 도서관에서 제 딸을 위해 고른 책들이다. 외출복도 채 벗지 못한 채 아이 옆에 앉아 책을 펼치는 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잠들기 전 엄마의 낭독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드는 손녀, 그리고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도 이제 자신의 독서에 집중하는 딸의 모습은 묘한 전율을 일으킨다.


현직 검사인 작은딸 역시 우리 집에 들르면 대화보다 책 속에 파묻히는 쪽을 택한다. 이제 백일이 지난 아기에게 벌써 책을 읽어주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아, 독서 DNA는 시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자식의 골수에 박혀 대대로 전해지는 독한 놈이구나.‘


독서 열풍은 엉뚱하게도 남편에게까지 옮겨붙었다. 본래 책에 관심이 없던 남편은 사업을 정리하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독서의 즐거움에 눈을 떴다.


읽은 책을 요약하고 리뷰를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정해진 일과가 되었다. 작년 한 해에만 무려 100권이 넘는 책을 독파한 남편은 본인의 생애 그 어느 때보다 유식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지식이 풍부해진 남편은 사사건건 나를 테스트하려 든다. 내가 정보를 알고 있는지 확인한 뒤 기를 살짝 죽여놓고는, 서론·본론·결론을 갖춘 긴 연설을 시작한다. 집안의 유일한 대화 상대인 나는 요즘 남편의 지적 유희를 받아내느라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안다. 집안에 키보다 높게 쌓인 책들이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가장 든든한 울타리라는 것을.


고단한 삶의 고비마다 책장을 넘기며 길을 찾았던 우리 가족의 유산은, 지금 막 말문이 트인 손녀의 고사리 같은 손 위에서도 여지없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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