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사의 업그레이드 고난기

by 해림

“교장 선생님은 영어 교사이시니 자녀분들 영어교육은 식은 죽 먹기였겠어요. 비법 좀 알려주세요.”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동료들은 부러움 섞인 질문을 자주 건네온다. 어느 학원이 좋은지, 영어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묻는 그들에게 나는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인다.


지금은 서른을 넘겨버린 두딸들에게 내가 시도했던 영어교육 방법들이 어떠했는지는 세세하게 기억해낼 수는 없다. 게다가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뀐 지금, 왕년의 방식을 정답인 양 내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는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기란 쉽지 않다. 나는 두 딸에게 영어라는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돈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엄마였고, 원어민 같은 유창함을 갈망하며 평생 영어와 치열하게 격투해 온 '지독한 영어 교사'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운영위원회를 마친 후 한 학부모도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자녀분을 교장실로 보내주세요. 제가 매일 단어 100개씩 외우게 하고, 다 못 외우면 집에 안 보내겠습니다.”


학부모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지만, 그것은 농담을 빌린 나의 진심이었다. 요즘은 스마트폰 앱으로 편리하게 단어를 익히는 시대라지만, 외국어를 깨치는 데 있어 부단한 암기와 훈련보다 정직한 방법은 없다고 믿는다.


언어 습득의 원리는 단순하다. 우리는 18개월 된 손녀에게 모국어를 끊임없이 제공했기에 아이는 듣는 말 대부분 이해할 수 있으며 이제는 몇 단어씩 내뱉기 시작했다.


말랑한 뇌에 우리말이 깊은 흔적을 남긴 것이다. 아무리 빨리 영어교육을 시작한다 해도 노출의 양과 질 면에서 모국어를 따라잡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비법은 명확하다. 최대한 일찍 영어교육을 시작하여 노출 환경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다만, 모국어라는 뿌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균형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2000년도 새천년이 시작되고 세계화와 인터넷 확산으로 의사소통 중심 영어의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여유 있는 집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해외어학연수를 떠났다.


우리 부부는 빈손으로 결혼했기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서 연수 비용은 다소 사치로 여겨졌지만 그보다는 영어 교사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이들만 해외연수를 보내는 프로그램을 믿을 수 없었다.


아이들을 보내지 못하는 미안함에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집안을 영어 자극으로 가득 채웠고, 나도 한순간도 쉬지 않고 영어를 읽고, 쓰고, 말하고, 청각이 손상될 정도로 쉼 없이 듣기에 매달렸다.


하지만 교실에 외국 살다 왔거나 해외연수를 받고 온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나의 자격지심은 커져만 갔다. ‘미국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한 영어 교사’라는 꼬리표가 나를 위축시켰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는 더욱 미친 듯이 공부했다. 때마침 교육청에서도 영어 교사들에게 영어 공인 성적을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동료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고득점을 갈아치우며 나를 증명해 나갔다.

그러던 중 학비와 가족 생활비, 항공료까지 전액 지원되는 ‘영어 교사 해외 파견 프로그램’ 이 생겼다. 유능한 교사로 거듭나는 동시에, 연수를 보내주지 못한 딸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단 한 명을 선발하는 문은 좁고 험했다. 60년대생 영어 교사였던 나보다 영어가 자연스러운 젊은 후배들에게 밀려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포기할 법도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원어민 교사를 붙들고 면접 연습을 반복했고, 손에는 늘 영어 신문을 쥐고 살았다. 24시간 이어폰을 귀에서 떼지 않은 채 영어에 중독되어 살아간 지독한 나날들이었다.


2007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2년이었던 파견 기간이 6개월로 축소된 것이 내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미 박사과정을 마친 내게는 학위보다 실용 영어가 절실했고, 입시를 앞둔 큰딸과 직장을 그만두기 힘든 남편도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도전한 끝에, 마흔넷의 나이로 최종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성적표의 최고 등급 숫자를 확인하던 날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쉬지 않고 배우고 가르쳤던 시간들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더 나은 교사가 되고 싶어서, 그리고 엄마로서 내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는 자신을 담금질하며 버텼다. 그 간절함이 기어이 길을 만들어냈다.


나는 중학생이 된 작은딸의 손을 잡고 플로리다 올랜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도 치열했던 계절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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