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땅에서 치맛바람을 일으키다

by 해림

2007년 무더웠던 광복절, 나는 중학교 1학년이던 작은딸의 손을 잡고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로 향했다.


사십 대 중반, 학교와 가정이라는 톱니바퀴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온 내게 이번 파견 연수는 단순한 연수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일상의 수렁에서 나를 건져 올려준, 국가가 선사한 ‘광복’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명만을 선발하는 영어교사 국외 파견 연수. 바늘구멍을 통과해 얻어낸 황금 같은 기회였지만, 혜택이 큰 만큼 책임도 무거웠다.


대학 선정부터 입학 허가, 프로그램 설계까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영어를 쏟아내고, 미뤄두었던 박사 논문의 기틀까지 완성하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품고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던 시절이 아니었다. 8월의 올랜도 공항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도착 다음날부터 나는 직접 렌터카를 몰며 집을 구하고, 중고차를 사고, 인터넷 설치하고 핸드폰 사고,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켰다.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책상을 딸과 함께 거실로 옮겨놓고 나서야 비로소 미국 생활의 실감이 났다.


나는 미리 입학 허가를 받아 두었던 커뮤니티 컬리지(Community College)에서 어학 코스를 시작했다. 석사 학위 과정의 압박 없이 실전 영어에만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은, 오히려 내게 큰 행운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첫날 새벽, 작은딸은 집에 가고 싶다며 불안에 떨며 울었다. 아이를 다독이며 뜬눈으로 아침을 맞는 동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이를 이 고생을 시키나,’ 하는 후회가 스쳤다.


나는 딸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 큰소리를 쳤다. 사실 나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공립 중학교에 아이를 떼어놓고 돌아오는 길, 내 마음은 보육원에 자식을 맡긴 엄마처럼 아릿했다.


그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낯선 미국 땅에서 유례없는 ‘치맛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입학 다음 날, 딸이 스페인어만 사용하는 남미 이민자 자녀 학급(ESOL)에 배정되었다는 소식에 억장이 무너졌다. 영어를 배우러 와서 스페인어만 듣다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로 달려가 카운슬러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우리는 영어를 배우러 왔지, 스페인어를 배우러 온 게 아니다. 당장 학급을 교체해 달라.”


다행히 딸은 실력 테스트를 통과해 정규 수업에 합류했다. 그러나 토론 위주의 과학 수업 앞에서 아이는 다시 기가 죽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교과서를 대출해 아이와 미리 읽고 토론 주제를 예습했다. 아는 내용이라면 아무리 말이 빨라도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위기는 계속되었다. 영어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이민자 아이들과 섞여야 했는데, 스페인어를 모르는 딸이 놀림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는 다시 카운슬러를 찾아가 단호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에 스페인어 과외 선생님을 구해 특별한 부탁을 했다.


“선생님, 우선 스페인어 욕부터 몇 개 가르쳐주세요.”


혹시라도 아이가 다시 무시당하면 기죽지 말고 맞서길 바라는, 지독한 한국 엄마의 본능이었다.


물론 딸이 그 욕을 실제로 쓸 일은 없었지만, 엄마의 단호함은 아이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었다. 수줍음 많던 아이는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지니어스(Genius)”라는 찬사를 들으며 전 과목 A+의 우등생으로 우뚝 섰다.

크리스마스 방학 기간, 나는 딸과 대학 젊은 친구들을 태우고 플로리다 남단 키웨스트까지 9시간을 운전해서 도달했다. 쿠바를 마주한 대서양 바닷물에 손을 담그며, 나는 이곳에 왔노라고 당차게 신고했다.


만약 내가 남들처럼 현실에 안주하는 소심한 교사로 남았더라면, 혹은 교육청의 정책에 반기만 들며 주저앉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정면 돌파한 시간은 교사로서의 성장뿐만 아니라, 그 어떤 비싼 조기 교육보다 값진 원동력을 딸들에게 선물했다.


6개월의 파견은 나를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강철 엄마’로 만들었고, 영어 교사로서 어깨에 훈장을 단 듯한 자신감을 주었다. 불안에 떨던 딸의 눈망울은 어느새 자신감으로 이글거렸다.


낯선 환경을 견뎌내며 당찬 아이로 탈바꿈한 딸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고통 뒤에 오는 성장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나는 참 운이 좋은 교사였다. 국가의 지원으로 두 번이나 미국 땅을 밟으며 넓은 세상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 행운의 무게만큼 책임감도 무겁다.


올랜도의 일렁거리는 무더위 속에서도 야자수는 빳빳하게 살아남아 열매를 맺는다. 예고 없이 내리는 스콜이 대지의 열기를 식혀주듯이, 내 삶의 고단함 뒤에도 늘 시원한 기쁨이 찾아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제 이 찬란한 경험을 교실에서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온전히 전해주리라 수없이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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