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아수라장 거실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여자
"엄마, 난 피아노보다 바이올린을 더 좋아했어. 그때 선생님이 늘 나보고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거든."
어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함께 배웠던 큰딸이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하며 건넨 말이다. 역시 칭찬은 고래뿐 아니라 서른 중반이 된 워킹맘을 아직도 춤추게 하는 모양이다.
딸은 다섯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덤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당시엔 흔치 않던 악기라 시립교향악단 선생님을 수소문해 가르쳤는데, 전공은 아니어도 두 악기 모두 꽤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큰딸이 다시 바이올린을 잡겠단다. 개인 레슨을 신청하고 바이올린을 새로 사더니, 며칠 전엔 일본 중고사이트에서 수백만 원 호가하는 유명 악기를 저렴하게 득템 했다며 아이처럼 신이 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게 묻는다. "엄마, 예전에 내가 쓰던 스즈키 바이올린 교본 어디 있어?"
딸의 말에 의하면 그 옛날 교본에는 선생님의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요즘 교본보다 질이 좋아 중고 시장에서 웃돈까지 붙어 거래된단다.
"엄마가 다 버리니까 우리 집엔 '레거시(Legacy)'가 없잖아!" 딸의 투덜거림에 애통함이 밀려왔다.
요즘 딸은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먹고는 바로 바이올린 활을 잡는다. 큰 손녀는 할머니가 사준 미니 바이올린을 들고 나와 폼을 잡고, 작은 손녀는 소리를 지르며 거실을 기어 다닌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연주에 심취한다. 새로 산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는 초등학교 때 아빠와 함께 갔던 장한나 연주회 팸플릿이 여전히 꽂혀 있다.
"엄마, 선생님이 나보고 여전히 잘한대. 어릴 때 배운 게 몸에 남아있다네? 내 팔이 길어서 바이올린 하기에 딱이래." 신장이 170cm를 훌쩍 넘는 딸은 긴 팔을 휘두르며 다시 칭찬받기 좋아하는 '한 마리 고래'가 된다.
돌아보면 빠듯한 형편에도 레슨비를 대며 악기를 가르쳤던 시간들이 있었다. 아이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두 팔로 악기를 꽉 쥐고 행복한 표정으로 선율에 빠져드는 딸을 보니 그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산만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언제든 숨어들 수 있는 자신만의 '악기'라는 피난처를 가졌으니 참 다행이다. 비록 내 손으로 버린 '스즈키 교본'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딸의 몸이 기억하는 선율만큼은 영원한 레거시로 남을 테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