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손녀와 '맹구'가 되었던 딸

by 해림


큰손녀가 태어나서 두번째 미용실 나들이를 무사히 마쳤다.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 속 손녀는 어쩜 저렇게 의젓할까.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입을 야무지게 앙다문 모습, 눈동자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 있지만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는 눈망울이 예사롭지 않다. 이번만큼은 절대 울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화면 너머까지 전해졌다.

아마도 큰딸은 아이에게 ‘의젓함’이라는 주문을 걸었을 것이다. “이제 곧 동생이 태어나면 언니가 될 텐데, 언니들은 미용실에서 울지 않는대.” 곧 언니가 된다는 자부심이 아이의 등을 떠밀었으리라.


사실 지난번 첫 방문 때는 그야말로 대성통곡의 향연이었으니, ‘서열’을 무기로 삼는 이 교육 방식이 아이를 조금씩 성장시키는 모양이다.

오후에 만난 손녀의 머리는 단정한 단발이 되어 있었다. 아기 특유의 보드랍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사라진 자리에 ‘성장’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듯했다.


“미용실 다녀왔구나? 이번에는 울지 않고 예쁘게 잘랐지?”


내 물음에 아이는 천진하게 답한다. “이번에는 울었어요.”

“이번에는 안 울고, 저번에는 울었지?”


시제를 정리해 다시 묻자 그제야 아이는 “네, 이번에는 안 울었어요”라며 즉각 오류를 수정한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이해하고 답하는 모습이 그저 대견할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큰딸은 제법 클 때까지 몸에 닿는 손길에 극도로 예민했다. 이마에 꽉 끼우는 ‘헤어캡’이라는 위대한 발명품이 없던 시절, 머리를 감길 때마다 우리 집은 전쟁터가 됐다.


눈에 비눗물이라도 들어가는 날엔 동네가 떠나가라 괴성을 질러댔다. 미용실의 이발기 소리나 가위의 서늘한 감촉은 오죽했을까. 기겁하며 울어대는 바람에 한동안 미용실 근처엔 가보지도 못했다.


덥수룩한 머리를 참다못한 남편과 나는 어느 날 큰 결심을 했다. 아이가 잠든 틈을 타 몰래 가위를 든 것이다. 하지만 의욕만 앞섰던 초보 부모의 손길은 결국 딸의 머리를 ‘맹구’로 만들어버리는 대참사를 낳고 말았다.


잠에서 깨 거울을 본 아이를 보며 우리는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결국 며칠을 버티다 끌려가듯 미용실을 찾았고, 상가 전체를 울리던 딸의 곡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요즘은 육아 환경이 참 좋아졌다. 헤어캡은 기본이고 사소한 불편함조차 허락하지 않는 ‘육아템’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토록 물샐틈없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출산을 망설인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철없는 할머니인 나는 가끔 농담 섞인 진심을 내뱉곤 한다.

“학교에는 육아시간과 모성보호 시간도 있고, 육아휴직도 잘 되어 있잖아. 남편들이 주방에서 진을 치고 도와주니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야. 내가 능력만 된다면 한 명 더 낳아 기르고 싶네!”


늙은 할머니의 철 지난 소망일지 모르지만, 단정해진 손녀의 단발머리를 보고 있노라면 그 고단했던 육아의 기억마저 예쁜 추억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아이는 자라고, 그 자라남을 지켜보는 것만큼 생의 찬란한 기쁨은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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