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식사와 수면 마취 사이, 환자의 선택권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껏 엄마를 향해 ‘엄마’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나뿐만 아니라 나의 두 딸도, 이제 갓 생후 6개월이 된 둘째 손녀도 두 입술을 달싹이며 그 신비로운 단어를 내뱉기 위해 온 힘을 쥐어짜고 있다. 우리는 평생 수억만 번 ‘엄마’를 부르고, 이 세상 어느 엄마든지 아이의 부름에 지체하지 않고 “응”이라 대답하지 않는가?
나의 어머니도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뒤로 내가 부르면 무조건 “응”이라 답하셨다. 이제 어머니는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을 거의 구사하지 못하신다. 어쩌면 안 하시는 듯도 하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를 흔들며 큰 소리로 부르면, 어머니는 몽롱한 의식 중에도 반드시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로 “와(왜)”라고 대답하신다.
기도 삽관을 반복하며 앞니는 빠졌고 성대는 깊게 손상되었다. 몸의 근육이 모두 빠져 말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의사 오빠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천륜의 의무를 수행하듯 나의 부름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신다.
장기가 모두 사라지고 뱃속에 커다란 동굴이라도 생긴 듯, 그 깊은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울림을 내뱉으시는 것이다. 곁에 있던 사위가 "장모님"하고 부를 땐 미동도 없으시다가도, 딸자식인 내 목소리에는 본능적으로 깨어나신다.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는 나무가 되기 위해 식사를 거부한다. 병원에서는 영혜의 손을 결박하고 유동식을 공급할 콧줄을 억지로 삽입하려 할 때 병실은 아수라장이 된다. 어머니 역시 기도 삽관과 콧줄을 여러 차례 경험했지만, 소설 속 영혜와 같은 저항은 할 수 없었다. 중환자실에서는 어머니를 수면 상태로 잠재워 어떤 몸짓도 불가능하게 만든 뒤 모든 처치를 끝냈다. 환자의 선택은 지워졌고, 오직 보호자의 동의만이 서류 위에 차갑게 남았다.
네 번째 중환자실 입원 후, 수면에서 깨어난 어머니가 또렷하게 뱉은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내가 죽을때가 지났다.”
그 정확한 세 음절의 발화를 끝으로 어머니의 상태는 다시 롤러코스터를 탔다. 이제는 말씀을 안 하시는 게 아니라 못 하시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내가 “엄마”하고 부르면 여전히 “와,” 하신다. 뇌과학자가 말하는 고정 행동 패턴처럼 갑자기 들리는 큰소리에 우리가 몸을 움찔하듯이 새끼들이 부르는 소리에 어미는 숨이 붙어 있는 한 자동으로 대답하는 본능의 울림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저 깊은 동굴에서 나오는 듯한 울림조차 영원히 듣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자문한다. 저 대답 한마디를 듣자고, 어머니를 침대에 묶어둔 채 콧줄로 삶을 강제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일까. 남편 역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한다.
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저런 상태라면 제 손으로 모든 장치를 떼어버리겠다는, 무법적이고도 서글픈 진심을 내비친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끊이지 않는 "와"라는 대답 속에는 아직 삶의 의지가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자식을 향한 마지막 배려만이 남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