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단 하루를 쉰 뒤, 곧장 고향 땅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버지는 연고 하나 남지 않은 타향 같은 고향 땅에 홀로 누워 계셨다.
“아버지, 이제 여기서 나갑시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오랫동안 혼자 계시느라 외로우셨죠?”
묘소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생전 병석의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건강했던 시절의 자신을 붙잡고 싶어 했던 그 간절함을, 철없던 어린 자식들은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남편의 그 지독한 향수를 외면치 못해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땅에 묫자리를 마련하셨다. 자식 된 도리로 찾아가기엔 너무도 먼 곳이었으나, 아버지 당신은 고향 품에 안겨 평안하셨을까.
오십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장지에 따라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수발을 도맡았던 외동딸이 굳이 험한 광경까지 볼 필요 없다는 어른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실상은 11월의 차가운 땅속으로 아버지를 매장하는 장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아버지와 완전히 정을 떼고 싶었다.
수려한 외모에 영특했던 아버지는 능력을 채 펼치기도 전, 사십 대에 날개가 꺾여 10여 년을 투병하다 떠나셨다. 나는 아버지가 이승의 고통을 벗어나 성한 몸으로 환생하기를 바라며, 하루빨리 그를 잊고 싶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집을 비우면 남자 형제들은 밖으로 나돌았고, 병든 아버지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뇌출혈 후유증으로 정신과 신체가 온전치 못했던 아버지는 내게 권위 있는 어른이기보다, 나를 옥죄고 괴롭히는 성가신 존재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된 10년의 돌봄이 끝나는 지점에서, 나는 어느덧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보낸 날, 집에 남겨진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이불을 빨고 청소를 하며 그날의 혼란을 외면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오늘, 장지조차 가지 않았던 차가운 딸은 환갑의 나이가 되어 용감하게 아버지의 묘소를 개장했다. 굴착기가 흙을 파내고 아버지의 유골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평온하게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목관은 이미 흙이 되어 사라졌고, 반쯤 삭은 천에 싸인 유골이 땅 위로 올라왔다. 멀리 있는 형제들을 위해 동영상을 찍어 전송하는 나의 손길엔 흔들림이 없었다.
"40년 된 유골이 발가락뼈 하나까지 그대로인 걸 보니, 이 자리가 명당이라 할 수는 없겠네요. “
이장 업자의 무심한 한마디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혹여 묘를 함부로 옮기는 게 아닐까 싶어 오빠를 시켜 철학관까지 다녀오게 했건만, 업자의 말대로 이곳이 그리 좋은 터가 아니었다면 이제라도 어머니 곁으로 모시는 게 백번 잘한 일이지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묘지를 이장해야 무탈할 것이라던 예언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이제 나는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강철 인간'이 되었기에, 미신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합치해 드리는 일이었다. 완전히 밖으로 나온 아버지의 유골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속삭였다.
“아이고, 아버지. 이제 집에 갑시다. 너무 오래 여기 버려두다시피 해서 미안합니다.”
유골을 화장하여 어머니가 계신 추모 공원에 자리를 마련했다. 애잔한 추모곡이 흐르는 가운데 아버지를 어머니 바로 옆자리에 안치해 드렸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미리 준비한 두 분의 빛바랜 결혼사진을 유골함 곁에 두었다.
“아버지, 구십 노인이 된 엄마 모습 보고 혹시 못 알아보실까 봐 결혼사진 준비했으니 엄마 외면하지 마세요. 이제 두 분이 함께 계시니 나는 엄마 걱정 안 할 겁니다. 40년 동안이나 엄마를 내게 맡기고 가셨으니, 이제부터는 아버지가 엄마 좀 잘 돌봐주세요. 아버지, 사실 그동안 저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엄마를 홀로 모시며 겪었던 내 삶의 고단함을 아버지에게 따지듯 항의하고 싶었지만, 어렵게 성사된 재회의 날이기에 오늘은 꾹 참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번에 찾아올 때는 그동안 못다 한 말들을 다 쏟아낼 작정이다.
아버지, 이제 엄마 손 꼭 잡고 행복하게 계세요. 이제는 정말 외롭지 않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