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나는 옷 몇 벌을 붙잡고 '셀프 염색'이라는 거창한 사투를 벌였다. 대야를 펼치자마자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과정은 고단했고 결과물은 처참했다. 역시 인생의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사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사 입는 게 낫다."
시작은 남편의 사소한 한마디였다. 딸에게 선물 받은 아끼는 폴로셔츠의 칼라가 변색된 것을 보더니, 남편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여기만 어떻게 염색 안 되나?"
그때만 해도 나는 이성적이었다. "안쪽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입어요. 좋은 옷인데 괜히 건드리지 말고." 그렇게 대화는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내 안의 '과감한 실행력'이 잠자던 호기심을 깨우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셀프 염색 후기를 섭렵하더니, 홀린 듯 염색약을 주문하고 있었다.
폴리에스테르만 아니면 면, 마, 심지어 나일론까지 가능하다는 설명서의 호기로운 문구에 마음을 뺏겼다. 나는 죽어가는 옷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의류 심폐소생술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첫 타자였던 남편의 셔츠는 꽤 성공적이었다. 제 색깔과 같은 네이비 염료를 덧입히니 제법 새 옷 같은 기색이 돌았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첫 끗발의 달콤함에 취한 나는 멈출 줄 모르는 폭주 기관차가 되어버렸다. 미친 듯이 솟구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획에도 없던 옷들을 줄줄이 소환했다. 밤이 깊도록 이어진 염색 전쟁의 결말은 참혹했다.
세탁으로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거나 이미 색이 바래 층이 진 옷에 염색은 대안이 아니었다. 결과물은 노숙인조차 외면할 법한, 얼룩덜룩하고 기괴한 형상의 '쓰레기'였다.
분명 검은색 염료를 썼건만 옷은 희끗희끗한 회색빛을 띠었다. 결국 어제, 공들여 염색한 옷 네 벌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냥 내놨더라면 누군가에겐 소중한 옷이 되었을 텐데, 나는 돈과 공을 들여 멀쩡한 옷을 폐기물로 만드는 연금술을 부린 셈이다.
검게 착색된 플라스틱 대야를 닦아내느라 팔다리가 쑤셨고, 쉼 없는 헹굼질에 손목은 시큰거렸다. 빨랫대에 걸린 괴상한 색깔의 옷들을 보며 나는 조용히 머리를 쥐어박았다.
'완벽한 새 옷'을 꿈꿨던 기대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였을 뿐이다. 정확한 지식도 없이 용맹하게 덤벼들고는 애꿎은 남편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마치 남편이 등 떠밀어 시킨 일인 양 "당신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며 적반하장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내 잘못이 너무 명백할 땐 남 탓이라도 해야 편한 법이니까.
비싼 수업료를 내고 소중한 진리를 얻었다. 염색은 옷의 상태를 업그레이드해주지 않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소파에 누워 마스크팩이나 붙이고 쉬었더라면 얼굴 주름이라도 조금 펴졌을 것을.
아마 나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런 식으로 나의 '무모한 용맹함'을 테스트하며 살 것 같다. 열정 조절 장애는 불치병에 가깝다는 사실을 다시금 체감한다.
"그래도 당신 셔츠는 성공했으니 옷 한 벌 값은 벌었잖아요, 안 그래요?"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남편에게 큰소리를 쳤다. 수확이 있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는 뻔뻔한 합리화다.
말 뒤집기를 밥 먹듯 하는 아내를 둔 덕분에 오늘도 당하는 건 언제나 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