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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작정 Jun 05. 2023

낭만이라 이름 붙이면 낭만이 되는 것을, 여수 낭만포차

퇴사 일기 - 나의 지난했고 지난할 방송국 생활을 위하여

여수에 온 지 나흘째. 작은 이모가 여수에 왔다.


나와 작은 이모의 사이는 여느 이모-조카 사이보다 각별할 것이다. 엄마는 다섯 남매를 키우느라 늘 바빴고, 싱글인 이모는 내가 중학생 때까지 우리 집에 살면서 우리를 공동 육아를 했다. 다만 이모가 우리를 키우는 방식은 사뭇 달랐는데, 내 유년 시절에 있어 이모는 부모님이 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이모는 내 생애 첫 영화관 나들이를 시켜준 사람이었고(이웃집 토토로!), 내가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선 방을 함께 쓰던 룸메이기도 했는데, 그 시절 이모의 옷장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모는 모를 것이다. 내가 방과 후마다 이모 옷을 얼마나 입어봤는지... (라고 쓰고 보니 100퍼센트 알았을 것 같다. 내가 제대로 원상 복구했을 리가 없지.) 이모가 양방언을 좋아하는 덕분에-비록 지금은 임영웅으로 기운 것 같지만-일찍이부터 크로스오버 뮤직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수많은 공연을 보러 다녔고, 양방언의 생애를 다룬 다큐도 봤으며 아직까지도 때때로 양방언의 노래를 찾아듣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Mint Academy>로 대학교 신입생이 된 조카의 대학생활을 상상하며 쓴 곡인데, 조카인 나는 이 곡을 들으면서 이모를 떠올린다. 이모랑 같이 요가원에 다닌 적도 있다. 비록 나는 요가원 근처에 파는 이디야 녹차 빙수와 잔치국수를 좋아해서 다닌 거지만... 생애 첫 해외여행도 이모와 함께 갔다. 그때 일본 오사카를 다녀온 덕분에,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나는 일본어도 못하면서 외고 2 지망에 일본어과를 쓰고 결국엔 일본어과에 진학까지 했다. 이모의 친한 직장 동료들은 나의 이름을 알고, 내 친구들은 내가 이모를 유난히 따른다는 것을 잘 안다.


나를 늘 밖으로 끄집어내 주던 이모. 이모와 함께 있으면 매번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여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모가 여수에 도착하고 우리는 소호동동다리로 향했다. 날씨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이 꾸물꾸물했고, 외출은 널어두고 온 빨래를 걱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소호동에 도착했다. 처음 소호동동다리를 봤을 때는 '음... 이게 다라고?'라는 생각에 얼마간은 겸연쩍었다. 이모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지만 나 홀로 실망한 거다. 데크도 얼마 길지 않고 시야도 흐리고, 바닷물도 오늘따라 탁한 것 같고 블로그에서 본 이미지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제주도에 얼마나 좋은 곳이 쌔고쌨는데... (어른들은 어딘가에 놀러 가거나 먹으러 갔을 때, 가차 없고 신랄한 편이지 않나. 그래서 좀 눈치가 보였다.) 야간 조명이 켜진다 한들 풍경이 드라마틱하게 변할 것 같진 않은데,라는 의구심을 안은 채 밥을 먹고 조선다방이라는 여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가 길어졌기 때문에 다리에 불이 들어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동안 나는 퇴사하게 된 자초지종을 구구절절 얘기했다. 아빠는 내가 B 피디에 대해 욕을 하면, 남 욕한 것은 다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라며 욕하지 말라고 핀잔부터 주기 급급했지만, 이모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세상 온갖 진상이 다 모다는 은행에서 30년 가까이 일을 해온 이모다. 하지만 '세상에 또 이런 신박한 유형의 진상도 있네?' 하듯이 이모는 성실한 리액션을 해주었다. 그 또한 은행 짬바인가... 아무튼.


소호동동다리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밤하늘이 까매질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곳이었다. 사실 여수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해수욕장이 없는 편데, 대신에 다리란 다리에는 다 야간 조명을 켜놓아서 야경이 예뻤다. 괜히 여수 밤바다가 아니었다. 누구든 여수에 가면 <여수 밤바다>를 한 번쯤 흥얼거리게 되리... 나는 실제로 여수에 있는 내내 하루에 한 번씩-자의든 타의든-<여수 밤바다>를 들었다. 이쯤 되면 여수에서는 대구 김광석 거리처럼 장범준 거리라도 하나 조성해 줘야 한다. 아무튼 이곳에서도 이모가 <여수 밤바다>를 트는 바람에 함께 들었다.


"집 앞에 이런 곳이 있으면 매일 올 것 같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모가 그 말을 해주니까 좋았다. 안심이 됐달까?


우리는 사진을 백 장 넘게 찍으며 그 다리를 왕복했다. 이모는 숙소로 돌아가기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소주 한 잔 마시고 가면 딱 좋을 텐데~"

"그럼 낭만포차 갈래요?"


사실 낭만포차에 관해서 별로 안 좋은 후기들을 많이 봤다. 바가지가 심하다는 둥, 음식이 별로라는 둥, 취객으로 가득하다는 둥... 낭만포차라면 워낙 유명하니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관광객 마인드와 안 가봐도 별 아쉬움 없겠다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혼자 왔으니 갈 일도 없겠다 싶었는데 이모랑 함께라면 와이 낫?


이모는 바로 콜 했고, 우리는 그길로 낭만포차로 향했다.


낭만포차는 생각보다 낭만적이었다. 빼곡이 늘어서 있는 포차. 금요일이라 사람들은 바글바글했고 한편에서는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역시 야장의 계절이다. 밤공기는 달큼했고, 나는 알콜 프리 근데 취한 상태였다. 우리는 아무 포차에나 들어가 자리를 잡아 관광객들은 죄다 시키고, 현지인들은 그것 빼 시키면 된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돌문어삼합과 여수 낭만 이슬 한 병을 시켰다. '여수 밤바다 타령만큼 낭만 타령을 무지 하는군... 이 정도면 주입식 낭만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서빙되어 나온 소주병을 보니 귀엽다고 꺅꺅대며 누구보다 열심히 사진 찍은 사람... 그게 저예요^^



그러고 보니, 나는 술도 이모랑만 마신다.

엄마는 술을 아예 안 마시고, 아빠가 취한 모습을 내가 싫어하기 때문에 아빠랑은 안 마셨다.


술을 마시며 얘기하다 보니, 얘기는 다시 퇴사 스토리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모는 딱 한 마디 했다. "떠나온 것에는 미련을 갖지 말고."


나는 미련 없다고, B 피디랑 또 일을 하게 된다면 지구 끝까지 도망갈 것이라고 결연한 다짐을 했다. 물론 순도 100프로의 진심이었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철없다고 느꼈다. 이모는 한 직장을 30년 가까이 다니고 있는데...


물론 나는 프리랜서고, 여러 직장을 경유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사실 내가 소속된 회사는 없었고, 회사와 일정 기간 동안 계약을 하는 형태로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면 퇴사라는 말도 맞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많은 퇴사(?)보다 진짜 퇴사는 훨씬 엄중하겠지. 이모는 최근에 또 직원 한 명이 퇴사를 한다며, 은행에도 젊은 퇴사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얘기했다. 거기에 덧붙여 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왠지 조금은 씁쓸해 보였다.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한 직원이 카페를 창업하겠다고 은행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이모는 그녀에게 온갖 설득과 회유를 했었다. 당시 이모는 마치 내 일처럼 고민했었다. 평소 일도 정말 성실하게 잘해온 직원이라며 계속하면 날개 단 듯 더 잘할 텐데 왜 그만두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생각이 너무 뜻이 완고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모는 정말 안타까워했지만 직원은 결국 퇴사를 감행했다. 그 직원은 진짜로 이모가 사는 동네에 카페를 열었고, 꽤나 번듯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이모는 자주 그곳에서 커피를 사마시기도, 나에게 사주기도 했다.


그때 나한테도 이모 같은 선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의 음울했던 한 선배가 생각이 났다.


"하루라도 젊을 때 그만둬, 아직 늦지 않았어"라고 밥 먹듯 말하던 선배였다.


내가 일을 못했으면 이해라도 하겠다. 그녀는 늘 내게 일을 잘한다고 칭찬했고, 덕분에 일이 준다며(막내 때는 선배의 일을 줄여드리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다ㅠㅠ) 참 손이 안 가는 막내라며 좋아라 했었다. 그런데 가능한 한 빨리 그만두라니. 10년 넘게 이 일을 해왔으면서 왜 저렇게 자조적일까. 심지어 작가님은 팀 내에서도 촉망받는 작가였다. 나도 작가님이 쓰는 글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왜? 물론 선배가 그러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이 길의 끝엔 빛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 말은 너무 무책임하고 멋이 없었다. 그녀의 음울함은 조금씩 나에게 옮겨 붙었다.


여담이지만, 작가님이 담배 피우는 게 싫었다. 남이 담배를 피우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이건 좀 웃긴 이윤데, 작가님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멋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님은 늘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는 땅을 보고 담배를 피웠다. 기왕 피울 거라면 멋지게 피우면 안 되나? 차라리 고개 쳐들고 뻐끔뻐끔 대면서 도넛을 만드는 게 낫지 않나? 나는 아직도 그 작가님을 떠올릴 때면 고개를 푹 떨구고 담배를 피우는 뒷모습이 맨 먼저 연상된다.


그 무렵 나에겐 멋있는 선배가 필요했다. 자신 없는 나를 이끌어줄 듬직한 선배가, 이 길도 나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알려줄 선배가,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알려줄 선배가 필요했다.


원래 생 소주는 맛없어서 진짜 안 마시는데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로부터 나는 2년 정도를 방황했던 것 같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로 그저 기계적인 출퇴근을 반복했다. 첫 글에서 말했듯이 그 후로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달콤한 말을 해달라는 게 아니었는데, 그저 해볼 만하다고 말해주면 됐는데. 나는 낭만을 바란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낭만을 꿈꿀 수 있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거예요.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톡톡 내렸다. 이모가 그래도 하멜등대는 구경하고 가야 하지 않겠냐 해서 후다닥 하멜등대로 향했다. 다른 포차들을 지나면서 다른 데가 안주가 더 맛있었겠다고 말하며, 그래도 분위기는 좋았다고,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얘기를 하다 보니 눈 바로 앞에 거북선대교가 있었다. 바로 앞에서 보니까 더 웅장하고 멋있었다. 빗방울이 언제 거세질지 모르는데 나는 거기서 사진을 또 찍어대고... 하멜은 여기저기 족적을 남겨놨다며 제주도에도 하멜 전시관이 있는데 여기도 있네... 하면서 등대 앞에 굳이 줄을 서 사진을 찍었다.


택시를 잡고 숙소에 가려는데 기본요금 정도의 거리라 그런지 택시가 안 잡혔다. 걸어가려면 약 15분에서 20분. 비는 뜨문뜨문 오긴 했지만 언제라도 다시 내릴 수 있었다.


"이모, 가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계단을 엄청 올라가야 하지만 빨리 도착하는 방법, 두 번째는 경찰서 쪽으로 우회해서 경사는 낮지만 조금 오래 걸리는 방법. 어떻게 갈까요?"

"계단으로 가보자, 한 번쯤은 거기로 올라보고 싶었어."


의외의 답변에 나는 좀 감동했고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계단을 열심히 오르고 올랐다. 이모랑 같이 걸으니까 더 빨리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따뜻따뜻 노곤노곤한 게 이 모든 일들이 다 꿈같았다. 낭만포차에 간 것부터, 하멜등대에 갔다가 집에 오는 과정까지... 무엇 하나 계획된 게 없이 즉흥적이었던 외출. 결국 비에 젖은 빨래는 다시 거두어 빨아야 했지만, 그냥 그러면 되었다. 낭만이 우연성을 가진 걸까, 우연이 낭만성을 가진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다 한  차이지 않나? 포차 앞에 낭만을 붙이면 낭만포차가 되는 거고, 참이슬도 낭만 이슬로 택갈이를 하면 괜히 한번 들이켜 보는 거다.


이제 와 밝히지만 우리 이모 닉네임이 '낭만 쩡이'인데, 이름 앞에 낭만을 붙이면 낭만적인 사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만큼은 이모가 진짜 낭만의 화신이다. 이모는 나에게 영화, 음악, 여행, 등등 다 아름다운 것만 가르쳐주었고 성원에 힘입어 내 EQ 지수는 무럭무럭 성장했다. 이모는 아직도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틈틈이 공연도 보러 다니고, 그림도 배우며 살아간다. 현실에 두 발을 딛고도 여전히 삶은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그게 낭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 그러니 낭만 쩡이 포에버.


그날 여수 밤바다엔 낭만이 넘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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