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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작정 Jun 01. 2023

맞짱 토론: 여유는 시간에서 오는가, 잔고에서 오는가?

퇴사 일기 - 여수까지 와서 왜 이러니 (2)

여수에서의 둘째 날.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와. 여기 매트리스 뭐 써?'

  
오랜만에 푹 잘 잔 듯한 이 느낌. 누구든 함께 왔더라면 "좋은 아침!" 하고 인사하고 싶어질 정도로 나른한 평화가 온몸을 감쌌다.


우스웠다. 좋은 아침이라니...

19년도에 같이 일했던 모 피디님은 "** 씨, 좋은 아침"이라고 시작하는 카톡을 종종 보냈더랬다.

그때마다 나는 다른 게 아니라 그 워딩에 울화가 치밀었다.


또 시작이다, 좋은 아침 타령.

차라리 '아침이다. 일해야지?'라고 보내든가. 하루를 기만으로 시작하다니 괘씸해...


나에게 아침은 '좋은' 같은 좋은 수식어랑 병렬될 수 없었다.


(        ) 아침

피곤한 아침, 찌뿌둥한 아침, 배고픈 아침, 기운 없는 아침, 똑같은 아침, 지겨운 아침, 바쁜 아침, 길 막히는 아침... 세상에는 얼마나 다채롭게 나쁜 아침이 존재하는데 매번 '좋은 아침'이라니.


게다가 나는 이미 「5분 단위로 설정한 알람 10개 끄기」 퀘스트를 깬 지 오래란 말이다! 당신은 아침에 머물러 있을지언정 내 마음은 진즉에 시곗바늘 위로 올라탔다! 점심시간을 향해 무한 질주 중이란 말이다! 피디님이 뭔데, 알람도 아니면서, 저더러 좋은 아침이래욧!


하지만 여의도엔 없었던 좋은 아침이 여수엔 실존했다.


아침부터 무언가가 하고 싶다니 말도 안 됐다. 마음 같아선 아침 조깅이라도 하고 싶었다. (오버하지 마. 이 마을은 죄다 언덕길이야!) 뜬금없이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컵에 얼음을 채우고 전날 사온 콜드브루를 따랐다. 그래, 마당으로 나가자.


몇 평 되지 않는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 마당은 여의도보다 넓었다.


바다가 빼꼼 보이던 사랑스러운 마당. 호스트가 키우는 귀여운 화분들이 오종종하게 모여 있었고, 빨래 건조대를 펼쳐놓으면 거의 다 들어차는 아담한 공간이 있었다. 또, 세 명 정도가 둘러앉을 수 있는 작은 파라솔 테이블이 놓여 있었지. 더위는 아직 오지 않았고, 적당한 햇살이 내리쬈다. 그곳에서 나는 새소리를 듣다가 뱃고동 소릴 듣다가 괜히 재즈를 틀어놓고 책을 읽으며 모닝커피를 마셨다. 생각해 보니 모닝커피라는 말은 있어도 점심과 저녁에 먹는 커피를 런치 커피, 이브닝 커피라고 부르진 않았다. 그렇게 모닝커피는 신성한 것이다. 본래 모닝커피의 용도는-비록 아침부터 카페인을 수혈하는 용도로 변질되었으나-아침의 안온함을, 느긋한 여유를 즐기는 것이었으리라.


모닝커피에서 여수 한 잔


마침 읽고 있던 김화진 작가의 『나주에 대하여』에 이런 대목이 나왔다.


 예전엔 변심하면 여행이 시작되는 걸 굉장히 비웃었는데. 제가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이전에는요. 그런데 이상해요. 지역마다 내가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은주가 경주에서, 통영에서, 제주에서 느꼈다던 그 오래되고 낯선 시간을 나는 서울에서도 종종 느꼈다. 종로에서, 홍대나 합정에서, 광화문에서 걷는 나는 단일하지가 않았고 종로에서 합정의 나를 생각할 때, 광화문에서 홍대의 나를 생각할 때 언제나 서로가 어색했다. 거기 있는 몸과 여기 있는 몸은 다르지. 같지가 않지. 지박령처럼 장소에 매인 듯한 여러 개의 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아득해졌다.                      


김화진, 정체기 中, 『나주에 대하여』, 문학동네 (2022)


여수의 나는 아침을 좋아한다. 살기 위해 커피를 마시지 않고, 음미하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낯선 사람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길지도. 조금은 게으르다. (이건 여의도의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약간의 게으름은 애교로 칠 줄 안다. 많이 걷는다. 배달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발품을 판다. 대충 끼니를 때우지 않고 매 끼니 무얼 먹을지 열심히 궁리한다.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화를 내지 않고 욕도 쓰지 않는다. 조금은 너그러운 것도 같다...


여의도의 나는 이런 여수의 내가 어색하겠지.


아무래도 여유는 시간에서 나오나 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달콤함은 며칠 가지 않았다. 정확히 이틀 뒤, 나는 같은 자리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했다. (그 바다가 빼꼼 보이는 사랑스러운 마당에서 말이다.)


전부터 일을 쉬게 될 때마다-내가 선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쉬는 기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이유로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은 팀에 갈 수는 없어서 하염없이 좋은 프로그램 공고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이 또한 어불성설인 게 모든 곳은 겪어봐야 알지만.) 기다림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심장은 쪼그라들었다. 아무튼 이번엔 그러지 않고 싶어서 훌쩍 떠나온 건데 여지없이 걱정의 늪에 빠져버렸다. 덮어놓고 놀고 먹고 자고, 이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2주가 지나면 뭐 해 먹고 살 건데? 불과 이틀 전엔 부유하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난해졌다.


역시 여유는 잔고에서 나오나?

'여유는 잔고에서 나오고 상냥함은 당분과 탄수화물에서 나온다'라는 짤이 있다.

하지만 여의도의 나는 늘 여유가 없이 허덕이며 살았다. 그렇다면 여유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니,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여유롭지 않았던 것은, 실은 잔고가 넉넉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 아닐까? 여의도의 나, 일주일에 이틀씩 밤을 새우며 일했지만 잔고는 늘 모자랐다. 흑흑...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았다는 것조차 시간이 많다는 것의 방증일 테다. 그렇다면 더더욱 여유는 시간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역시 시간은 여유로 직결되지 않아, 쓸데없는 생각을 자꾸 하게 해!


이제 생각은 하다 못해 '생각하는 것'에 대한 회의로까지 번진다.


언젠가 필라테스 레슨을 받는데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회원님, 작가라고 하셨잖아요. 정말 작가 같아요."

"왜요?"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평소에 생각이 많으시죠? 이 짧은 유산소를 하는 동안에도 생각이 많아 보여요."


내가 생각이 많은 건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건데...라는 생각이-그놈의 생각이-그 순간에도 들었지만, 꽤나 충격받았다. 운동할 때만큼은 생각이 없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 순간까지도 나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구나. 마스크를 쓰고 몸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눈빛으로 들켜버리는구나. 부끄러웠다.

.

.

.

이젠 정말 자괴감이 엄습해 온다. 이 에피소드까지 기어코 생각해내고 만 나는 정말이지 오버 띵킹 대마왕이다! 역시 쓸모없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간 따위, 쓸모없다...


그때 집안에서 들려오는 슈베르트의 <송어>


빨래가 됐다. 마침내 이 모든 생각을 한 방에 정리해 줄 구원자 등판.

마당에 빨래 건조대를 펼쳐 빨래를 널었다. 하지만 또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와, 이렇게 바깥에서 빨래를 말려보는 게 얼마 만이야. 여기서 말리면 빨래도 뽀송뽀송 고슬고슬 잘 마르겠지? 수건에서 햇빛 냄새나겠다! 건조기도 좋지만 역시 클래식한 게 최고야. 근데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시간이... (역시 시간이 많은 게 최고인가?)


그렇다. 이 토론은 무효다.

여유는 시간과 여유가 함께 동반될 때 생기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그리고 세상에 완벽한 여유는 없음을, 또 한 번 깨닫는다.

난 다시 완벽한 이상형 같은 여유를 찾아 헤매겠지만...


전날 아빠에게서 받은 문자를 다시 읽었다.

'딸, 여수 살이는 어땨. 무릉도원은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만들어가는 곳인걸'


아빠, 저는 하루에도 무릉도원과 지옥을 열두 번씩 오가요.

근데 이런 나... 제법 웃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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