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나는 토익 공부를 이유로 휴학을 신청했다. 그동안은 대학교 기숙사에서 살다가 망원에서 자취를 시작했는데 그때였나. 처음으로 '나 서울 사람 다 됐네' 한 게.
집은 망원, 토익 학원은 신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지하철을 타고 망원과 신촌을 오갔다. 그뿐일까. 남는 게 시간이니 아침 일찌감치 수업을 받고 나면 오후에는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그랬더니 다음 달 교통비가 9만 얼마가 나왔다. 충격받은 나는-정기권을 끊었으면 됐을 텐데-신촌에서 망원까지 걷는 것을 택했다. 느릿느릿 걸어도 1시간 안쪽이기 때문에 못 걸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4월이었다. 알록달록한 봄꽃들과 푸릇푸릇한 새순이 참 예뻤지. 행여 그 아름다움을 놓칠 세라 풍경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느라고 걸음은 느려졌다. 하지만 내 귀가가 늦어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루에도 3-4번씩 낯선 이에게 붙잡혔기 때문이다!
종류도 다양했다. 길 묻는 척하다가 '도를 아십니까?'를 시전 하던 사람들, 대뜸 나에 대해 이것저것 추측하더니 본인이 귀인일지 모르니 얘길 더 하자며 커피를 대접하라던 사람들, 복조리를 파는 사람들, 도형심리테스트를 하고 가라는 사람들...
처음에는 거짓말로 대꾸하며-그 시절 나의 전화번호는 얼마나 다양했는지!-대충 둘러댔지만, 나중에는 지쳐서 숨을 참고(숨은 왜 참아) 종종걸음으로 재빠르게 사람들을 지나쳤다. 그렇게 점점 서울 사람이 되어갔다.
그새 길거리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줄이어폰의 자리는 에어팟과 블루투스 헤드폰으로 대체되며 그들이 설 자리가 많이 약해졌기도 했거니와, 전염병의 창궐은 낯선 이들과의 대화 자체를 꺼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수에 오니까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카톡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한꺼번에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던 노부부부터, (기사님에게 이 버스가 향일암에 가냐고 묻는 나에게) 저기 탄 외국인도 향일암에 가는데 학생(?)이 좀 챙겨줘...라고 부탁을 하던 아주머니까지. 하지만 가장 큰 임팩트를 남겼던 건 아무래도 첫날 만난 오리날개튀김집 사장님일 것이다.
오리날개튀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순전히 한 블로그 때문이었다. 블로그 주인장 왈, 본인은 여수에 출장 갈 때마다 '오리날개튀김'을 꼭 먹는다는 거다. '그게 대체 뭐길래' 하면서도 맛잘알 포스를 풍기는 글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오랜 자료조사 경력으로 비추어봤을 때 여긴 된다! 맛집이다!
마침내 가게로 입성하니 사장님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나를 보고 웃는다. 빙긋 미소를 짓는 것도 아니고 푸핫! 하는 우발적인 웃음이었다. 쟤는 대체 이런 데를 어떻게 알고 왔냐는 듯.
주문과 즉시여자 사장님이 오리날개를 튀기기 시작했다. 짐만 대충 부려놓고 멀뚱멀뚱 서 있으니 남자 사장님이 앉으라 하신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그가 보는 뉴스를 열심히 보는 척했다. 그러다 쓰레기통에서 흑곰이 나왔다는 해외뉴스를 보고 나랑 사장님이 동시에 빵 터지고 말았다. 흑곰도 마주친 사람도 너무 놀라 반대 방향으로 달음박질치는 영상이었다.
그때부터 아버님이(이제 사장님 아님) 나와 모종의 라포 형성을 했는지이리로 와서 같이 보리과자를 먹자고 했다. 여수 분이냐 묻기에 서울에서 여행을 왔다고 하니, 본인은 여수 사람이라 여수가 좋은지 모르겠다 하신다. 나도 제주도 사람이라 어떤 말씀인지 잘 알 것 같다고, 제주도에 오래 살다 보니 바다에 별 감흥이 없다 하니 또 한 번 반가워하며 본인의 제주도 여행기를 들려주셨다.
당신이 신혼여행 가던 시절만 하더라도 택시를 타고 정해진 코스를 돌았다며, 기사님이 내리라는 곳에 내려 사진 몇 방 찍고 나면 끝인, 뻔한 여행이었다는 얘기. 그런데 작년엔가 가족끼리 12인승 승합차를 렌트해 제주도 일주를 했다고, 당신 인생에 그런 여행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당신이 운전을 했다가, 사위가 운전을 했다가, 또 누가 운전을 했다가... 그렇게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일주일도 모자랐단다. 제주도에 그렇게 볼거리가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는 얘기.
"재밌으셨겠어요, 저도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녀야겠어요."
뉴스도 끝나고 투둑투둑- 다시 기름 소리만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이미 이야기의 물꼬를 텄기 때문에 오디오가 비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버린 참이었다. 일단 보리과자나 한 입 먹으며 생각할까, 무슨 얘깃거리가 있을까.
그런데 아버님이 채널을 돌리는데-설마 설마 했지만-나의 구 프로그램을 틀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이거 자주 보세요?"라고 물었더니, 자긴 매일 본다고 거기 관계자냐고 되물었다.
"제가 지난주까지 저기서 근무한 작가였어요!"
"그래요? 우리 집에 유명인이 오셨네?"
"에이, 제가 거기 출연하는 배우나 가수도 아니고 유명인은 아니죠."
들어보니 아버님은 모든 코너와 리포터를 다 꿰고 계셨다. 그러고는 왜 그만뒀냐고 물었다.
"그냥 오래 해서요. 다른 프로그램도 해보고 싶고..."
"힘들진 않았어요?"
"네?"
"방송국 작가가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나도 들은 게 있는데, 아무튼 힘들다고 하더라고."
"아...ㅎㅎㅎ"
그리고는 섣불리 아는 체한 게 머쓱하기라도 한 것처럼, 웃으며 이렇게 덧붙으셨다.
"나는 잘 모르지만요." (이 대목에서 사려 깊은 분이라는 게 느껴졌다.)
불현듯 옛 기억이 소환됐다.
5년 전-그러니까 2018년-일을 처음 시작할 때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의 첫 직장은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퀴즈 프로그램이었다. 녹화 날이면 출연자의 지인들도 응원단으로 함께 왔는데, 응원 구호와 플래카드를 직접 준비해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회의 시간에 부장님은 굳이 그게 필요하냐며 다 빼자고 했다. 그런데 팀장님과 메인 작가님이 내용을 다르게 이해한 게 화근이었다.
팀장님은 응원 구호는 빼되, 플래카드는 제작해 오는 것으로 이해한 반면,
메인 작가님은 응원 구호와 플래카드 모두 빼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나 역시도 후자로 이해했다.)
나는 메인 작가님에게 "언니, 그럼 응원 구호랑 플래카드 모두 빼는 게 맞죠?"라고 재차 물었고, 그렇다는 답변을 받았다.
"출연자들한테 연락 돌려. 이번에 구호랑 플래카드 준비 안 해와도 된다고."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그렇게 연락을 돌렸다. 그런데 막상 녹화 날이 되니, 팀장님이 왜 아무도 플래카드를 안 가져왔냐고 하는 거다.
망했다.
그게 내 잘못이든 아니든 수습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녹화 시간은 임박했고, 그때부터 직접 플래카드를 만들어야 했다. (곰손 조연출 외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기에 나 혼자 열심히 스케치북에 응원 문구를 쓰고 꾸미는데 한 피디님이 하는 말.
"야, 글씨체가 다 똑같잖아."
'... 한 사람이 쓰니까 그렇죠.'라는 말이 목구멍에 탁 걸렸다. (참자... 참자...)
그날 어떻게 녹화를 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없이 녹화를 마친 후, 또 한소리를 들었던 나는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참고 참다가 터진 울음은 걷잡을 수 없었는데 한바탕 울고 나니 쪽팔려서 나가기가 싫었다. (하필 울면 얼굴에 엄청 표시가 나는 스타일이다.) 그때 메인 작가님은 "그래, 차라리 한번 시원하게 우는 게 나아."라고 했던가. 죽기보다 울기가 싫었건만 또 울음이 터졌다.
입사 두 달 차에겐 잊지 못할 최악의 날이었다.
기분도 울적한데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지 싶어 친구와 함께 치킨을 먹으러 갔다.
그때 갑자기 걸려온 전화. 그날 녹화에서 우승한 아저씨에게서 온 것이었다.
"작가님,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요."
"아니에요, 선생님. 오늘 우승한 거 정말 축하드려요."
"다 작가님 덕분이죠. 고마워요, 정말로."
"아니에요, 제가 뭘 했나요..."
"제일 고생했죠. 그때 전화했을 때 우리 딸이랑 동갑이라고 했잖아. 방송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딜 가나 막내가 제일 힘들거든. 그래서 힘내라고 해주고 싶었어요."
출연자들 앞에서는 힘든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표가 났나 보다. 다 추스른 줄 알았는데 둑이 터지듯 또다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처럼 울었다.
고단한 하루였고,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이토록 선명한 것을 보면 아마 내 생애 최고의 위로를 받은 날이었다.
"방송국 작가가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나도 들은 게 있는데, 아무튼 힘들다고 하더라고."
이제 더는 24살이 아니기에 울지 않고 씩씩하게 답했다.
"힘들죠~ 근데 그만큼 재밌어요."
"아유, 그것 참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마침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됐네요. 다행이네요.
때맞춰 오리날개튀김도 완성됐다. 그런데...
"히익! 이렇게나 많아요?"
"허허,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으려나... 그래도 오리지널은 식어도 맛있어요. 남으면 데워서 먹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그곳에서 따뜻하게 데워 온 마음은 여수에 머무르는 내내 식지 않았다.
그날 밤, 오리날개튀김집 에피소드를 짤막하게 SNS에 남겼다. 그랬더니 친구들의 반응이 웃기다.
- 언제 이렇게 어른 됐어...?
- 마이 컸다 ㅋㅋㅋㅋ 넉살 머선 일~~ㅋㅋㅋ
그럴 만도 하지. 배달 어플이 없던 시절 치킨 하나 전화로 주문하기 어려워했던 내가, 출연자를 섭외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 하루에도 전화를 100통씩 돌렸다. 항상 거부당하고 퇴짜 맞기 일쑤였지만, 전화 상에만 존재하는 나를 딸처럼 손주처럼 예뻐해 주셨던 분들이 계셨다. 여태 방송이 펑크 나지 않고 꼬박꼬박 나간 건 그분들 덕이다. 참 기적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