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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작정 May 30. 2023

전 직장과 거리 두기

퇴사 일기 - 여수까지 와서 왜 이러니 (1)

요 며칠 이런 글을 찌끄린다고 했더니 A 피디님은 "이제 좀 빠져나와! 여수에서 다 털고 온 거 아니었어요?" 라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더니 글 하나를 보내 보라고 한다. 맨 첫 글엔 A 피디님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멋쩍었지만 '그래, 이 멋쩍음 하나 견디지 못하면 나는 아무 글도 발행할 수 없어!'라는 생각으로 메일을 보냈다. 하긴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내 원고가 전국 방송을 탔는데 이게 무슨 대수냐 싶어.


메일 제목은 '에세이와 비방 그 사이 어디쯤'

(당찬 포부와 그렇지 못한 제목. 멋쩍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내 글은 나의 넋두리인지, B 피디에 대한 악플인지,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도 참 나지. 너무 구질구질한가?


막상 막방 날은 쿨하고 담담했는데 말이다. 평소 망상 중독자인 나는 막방 시뮬레이션을 100가지 넘는 버전으로 돌려보았다. 하지만 실제는 상상보다 훨씬 싱거웠다. 메인 작가님은 "야~ 너 왜 안 울어? 좀 울어!" 했지만 옆에 B 피디가 있는데 눈물 같은 게 나올 리가. 눈물샘에서 눈물이 생성되기는커녕, 앞으로 한 달치 눈물까지 쏙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나는 분노가 소멸된 상태로 여수에서 돌아왔다고 선언까지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B에게서 받은 고통을 구태여 복기하며 글로 남기는 걸까... 현타가 올 무렵 온 답변.


"오오오오~ 겁나 잼나요. 다음 글은 언제 올라와요?"


아마 A 피디님은 B 피디가 누군지 알아서 재밌었겠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글을 쓸 명분을 얻은 것만 같았고 심지어는 이 글을 모두 쓴 후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직까지 전 직장과 거리 두기를 못하고 있구나.

아무리 B 피디를 싫어하는 마음이 강력하다고 한들, 그에 앞서 전 직장에선 좋은 기억들이 많았다.

B에 대한 증오보다 훨씬 힘이 센.



여수로 가는 KTX 안.


전날 새벽까지 짐을 챙기느라고 기차 안에서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막상 기차 안에 있으니 별의별 생각들이 들었다. 이건 여행일까, 도피일까, 잠적일까, 뭘까?


내 손으로 잘라낸 인연이다.


하지만 어쩐지 등 떠밀려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라 되뇌며 뛰쳐나온 직장이건만, '어째서 B 피디가 아니라 내가 나와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기분이 잡쳤다. 담당 시사 피디님은 이 코너는 작가가 다 캐리하는 코너라고 (B 피디 앞에서) 대놓고 말했고, 팀장님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내가 이 코너로 옮겨온 후에 점유율이 올랐다면서 칭찬을 했다. 물 질질 새는 밑 빠진 독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이 한 몸 두꺼비가 되어, 필사적으로 구멍을 막았건만. 내가 왜?


물론 동시에 '이미 다 끝난 일인데 떠나는 열차 안에서도 이러고 있다니... 후지다ㅠ'라는 생각도 들었다.


열차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 자강두천 같은 두 마음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며 꿈쩍을 않는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 내 맘 속 '소심이'(인사이드 아웃 보셨으려나...)를 데려와 당장 눈앞의 걱정들을 하게 한다.


- 설마 내 캐리어랑 짐가방 누가 가져가는 거 아니겠지? 내 2주 치 짐 거기 다 들어있는데ㅠㅠ

- 1시면 여수에 도착할 텐데 체크인 시간(3시)까지 뭘 하며 시간을 때우지? 밥이라도 먹어야겠지? 근데 안에 식당이 있나? (검색)

- 혼자 놀면 심심하겠지? 책을 한 권 더 가져왔어야 했나? 그나저나 안 챙겨 온 게 있으려나? 아냐, 됐어. 사면 돼 사면 돼~ 외국도 아니고...


역효과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젠장, 가뜩이나 심란한데 별안간 걱정까지 추가됨.'


덕분에 나는 여수엑스포역에 내리는 사람들 중 가장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하차했을 거다.

또, 누가 봐도 가장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내렸다.

그때 내 마음이 더 무거웠을까, 짐이 더 무거웠을까.


역 안에서 간단히 우동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파스쿠찌에서 여수에서 먹을 것들 리스트를 적으며 시간을 죽였다. 그러던 중 조연출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저 여수예요."

"??? 나도 여수인데..."

"개도 (촬영) 갔다가 올라가는 중. 작가님은 행복한 여수시죠."

"저 이제야 막 도착했어요. 여수엑스포역!"

"헐 오늘 내려오신 거예요?"


(잠시 개도 막걸리에 대한 얘기)


"점심 갯장어 샤부샤부 사달라고 해봐요. 미친 척하고"

"아까 안 그래도 작가님 생각나서 갯장어 샤부샤부 얘기했는데 A 피디님은 콧방귀를 뀌셨어요."


ㅋㅋㅋㅋㅋ


갑자기 혼자인 느낌에서 벗어나면서 조금 긴장이 풀렸다. 슬슬 체크인 시간도 다가왔다. 거대한 짐꾸러미를 끌고 드디어 역 바깥으로 나가 택시를 탔다. 숙소는 택시로 10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꽤나 경사진 곳에 있어서 '이거 걸어오려면 쉽지 않겠는데?'라는 걱정이 들 때쯤, 기사님이 다 왔다고 했다.


"우와, 예쁘다."



눈앞에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 이순신대교와 돌산대교, 평화로이 오르내리는 해상케이블카, 이 모든 풍경과 잘 어우러지는 알록달록 주택들, 작은 텃밭, 뿌우- 하고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마음이 두근두근한 것 같기도 고요히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기분이 좋았다. 오롯이 혼자였기에 그런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떠나오길 잘했지.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노이즈캔슬링 모드가 꺼진 것처럼 마음속 잡음들은 다시 한꺼번에 몰려왔지만.



그날 저녁, 서시장 근처에서 포장해 온 오리날개튀김을 먹으며 생방송을 봤다.

방송이 끝나고 ♡♡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다.


"대박 언니, 조업도 보냈어? 머시써여 작가님~"

"아니ㅋㅋㅋ (거기까지 가서 이걸 봐?) 왜 여길 못 벗어나냐고"

"아니 아까 오리날개튀김을 사러 갔는데 거기 주인 할아버지랑 우리 프로그램 얘기를 했거든. 갑자기 생각나서 봤어." (이 에피소드는 다음 편에 풀겠다.)


그러게, 왜 못 벗어났을까.

서울에서 여수까지 351km래.

몸은 이만큼이나 떠나 왔는데, 왜 아직까지 마음은 그곳에 머무르고 있을까.


이 갈팡질팡한 마음을 기념하며 맥주 한 잔 짠~



짠~해줄 사람 없고, 그냥 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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