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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작정 May 30. 2023

고장 난 테이프처럼 욕을 했다

퇴사 일기 - 어느 방송국 빌런이 준 교훈 (2)

퇴사한 뒤 처음으로 동료 작가들과 밥을 먹기로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른 작가님들의 퇴사 얘기로 흘러갔다. 내가 퇴사를 하고 난 뒤, 동료 작가 4명이 퇴사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나처럼 욱해서 나가는 건 아니고 계약 만료 시점에 맞춰서 퇴사하는 거다.)


밥을 먹기로 한 ○○ 작가님과의 카톡


"그나저나 작가님, 대거 이동이네요. 4명이라니... 물론 다 예견된 거였지만."

"그니까요. 제발 저도 이 흐름에 옮겨졌으면... 그런 행운이 찾아왔으면..."

"ㅋㅋㅋ이 참에 코너 바꿔달라고 하지. 작가님 다른 코너 하면 훨씬 스트레스 덜할 듯."

"차라리 태풍 왔으면 좋겠어요...^^... 배 안 뜨게... " (○○ 작가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조업하는 배를 섭외해야 하는 저주에 걸렸다. 물론 나도 그 저주에 걸린 적이 있다...)

"안 돼! 그럼 진짜 눈물 나요. ㅋㅋㅋ"

"하아 언제 익숙해질까요..."

"바다 아이템은 2년을 해도 안 익숙해지더랍니다..."

"그쵸? 저만 그런 것도 아니겠죠?"

"당연하죠. 바다가 진짜 제일 헬... 힘든 거 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다른 일은 훨씬 쉽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거의 고장 난 테이프 수준으로 징징거려도 받아주셔서 감사해요ㅠㅠ 내일은 이 얘기 안 합니다. 진짜."


고장 난 테이프 수준으로 징징거리기.


B 피디와 일하면서 내가 매일 하던 짓이었다.

나는 안다. 그 기분이 얼마나 참담한 지.

이 답답함을 표출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아무나 붙잡아 실컷 말하고 나면 속은 시원히 풀리지도 않고, 타인에게 불필요한 우울함을 전염시킨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는 그 익숙하고도 유구한 패턴. 부정적인 감정은 전이 속도가 빨라서 순식간에 목 끝에서 찰랑거리는 것으로 발전했고, 그 들끓는 감정을 결국 터트리고 나면 텁텁한 뒷맛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끝없는 악순환. 내가 잘 알지, 누구보다 잘 알지.


그 모든 마음을 가늠하고도 남기에 이렇게 말했다.

"ㅋㅋㅋ 제가 그랬거든요. 맨날 B 피디 때문에 △△ 작가님한테 징징대도 다 받아주셨어요."

- 참고로 △△ 작가님은 B 피디와 무려 2년 가까이 일을 한 보살이었다.

"그러니까 마음껏 해도 돼요. 그 고통을 아는 사람은... 다 받아줄 수 있는 것이다... "

"ㅋㅋㅋㅋ 아 B 피디는 다르죠. 모르는 사람도 욕할 수 있어..."


(말만이라도 고마워요ㅠㅠ)


물론, 방법을 달리해 직접 화를 내보기도 했다.

퇴사 의사를 밝히고 나서 나는 거의 미친 망아지나 진배없었다.


"피디님, 이렇게 성의 없게 편집한 파일을 주면 저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여기서 나만 성의 있죠, 나만!!! (사자후)"


"피디님, 제 후임 작가는 이런 거 안 하게 할 거예요. 이거 작가가 하는 업무 아니잖아요.

저 쪽팔려서 못 넘겨요. 그러니까 알아서 하세요. 여태까지 내가 해온 것도 억울해!"


"피디님, 거짓말인 거 다 알거든요? 저 이런 말 좀 그만하게 해 주세요. 네???"


이 방법도 통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B 피디 역시 또 하나의 고장 난 테이프였기 때문이다.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 또 반복. B 피디는 전혀 나아지지도, 고쳐지지도 않았다.

그래, 뭘 고쳐 쓰니. 뭘...


대신 나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차라리 도망을 가버리자. 이 지긋지긋한 서울! 떠나버리자.


모아둔 돈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좀좀따리 알바를 열심히 해 2주간 국내 여행할 정도의 여윳돈을 마련했다. 이제야 조금 숨구멍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리브애니웨어'와 '에어비앤비' 어플을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며 숙소를 찾고, 구글 맵으로 낯선 동네들을 살폈다. 일이 끝나고 침대에 누우면 나는 강릉에 가 있다가, 경주에 가 있다가, 여수에 가 있었다. 다음날 눈을 뜨면 또다시 그 익숙하고도 유구한, 고장 난 테이프 같은 현실이 기다렸지만.


그때마다 떠나고자 하는 열망은 커져만 갔다.

눈 뜨자마자 익숙한 권태가 온몸을 휘감게 두지 말고, 새로운 공기를 입고 걸치고 싶었다.


후보지는 강릉과 여수.

숙소가 오션 뷰는 아니더라도 근처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고,

뚜벅이이기 때문에 주변 편의 시설과 접근성이 괜찮은 곳들 위주로 찾았다.

(나는 제주도 사람이기 때문에 제주도는 후보지에 없었다.)


주변 작가들에게 말하자, □□ 언니는 떠날 거면 최대한 멀리 가라고 했다.

'역시 여수인가? 그래, 남도가 음식이 맛있지' 하며 찾아보다가 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갯장어 샤부샤부가 떠올랐다. 갑자기 그걸 무조건 먹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2주 간의 사치스러운 잠적이 시작됐다. 여수에 간다 한들 아무것도 바뀌진 않겠지만.


그리고 ○○ 작가님과 밥을 먹기로 한 당일,


"작가님! 왜 이렇게 얼굴이 폈어요!"

"작가님, 맨날 제 쌩얼만 보다가 쿠션 바른 거 처음 봐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거랑은 차원이 달라. 막 사람이 윤이 나요."

"제 안에서 화가 사라졌어요. 나한테 이제 분노는 없어."

"대~박"

"작가님, 근데 죄송해요. 여수에서 어촌계장님 섭외 못 했어요.ㅋㅋㅋ"


추신) 고장 난 테이프마냥 징징거리던 저를 받아준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나도 들어줄게. 얼마든지 들어줄게.


그 무렵 나의 인스타 스토리는 이런 것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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