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형의 인간을 싫어하세요?
퇴사 일기 - 어느 방송국 빌런이 준 교훈 (1)
나는 일을 한 지 만 5년이 된, 6년 차 방송 작가다.
얼떨결이지만 몇 달 전에 조연출을 뽑는 면접에 면접관(?)의 자격으로 들어가게 된 적이 있다.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했는지부터 시작해서 영상을 만드는 과정 중에 가장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나도 모 프로그램의 막내작가로 지원했을 때 들었던 질문이다) 등등... 나름 필요한 질문들을 던졌다.
그렇게 질문과 답을 주고받기를 거의 한 시간.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면접이라기보다는 미팅에 가까워진 지 오래였다.
그러다가 옆에서 같이 면접 보던 A 피디님이 하는 말,
"작가님, 이제 더 물어볼 것 없어요?"
"... 어떤 유형의 인간을 싫어하세요?"
내 입에서 불현듯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빌런을 만나 고군분투 중이었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방송국과 제작사가 있고 엄청나게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모든 게 '프바프' '팀바팀'이다. 프로그램마다, 팀마다 돌아가는 생리와 호흡이 완전히 다르다.
내가 속해 있던 프로그램은 크게 보면 흔히 '아방'(아침 방송), '저방'(저녁 방송)이라고 불리는 데일리 프로그램에 속했고 제작 기간은 2주에 불과했다. (그 안에 다음 주에 나갈 방송 아이템을 서치해서 섭외하고, 아이템 제안서를 내서 컨펌을 받고, 촬영 구성안을 쓰고, 그런 와중에 이번 주 방송을 위해 영상 파인-시사 받기 전에 가편집본을 보고 고치는 작업-을 하고, 시사를 하고, 자막을 쓰고, 내레이션 원고를 쓰는, 쭉 열거하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은 과정을 다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매 요일마다 3개의 코너가 있는데, 그 말은 즉슨 열댓 명의 '코너 작가'(서브 작가)가 코너를 하나씩 맡아 제작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내가 맡은 코너는 1부터 10까지 나와 담당 PD가 1:1로 딱 붙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와중에 섭외해 놓은 사람이 갑작스레 변심을 할 수도, 아니면 내가 잡은 아이템이 윗선에서 반려될 수도, 기상 상황이 중요한 아이템인데 날씨가 안 따라줄 수도... 방송이 안 되려면 안 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너무도 많았다. 그렇기에 작가와 PD가 열심히 상호 보완을 해야 겨우 일주일에 한 번씩 방송이 멀쩡하게 나갈 수 있는-물론 하면 다 되긴 한다-일정이었다.
나와 함께 했던 B 피디는 (*앞서 나온 A 피디와 헷갈리는 것을 막기 위해 구분했다) 안타깝게도, 의지할 만한 동료는 못 되었다. 나에게 같은 질문이 주어졌더라면 나는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어떤 유형의 인간을 싫어하세요?"
지금 본인이 하는 말이 부끄러운지 모르는 사람, 이라고 할 것 같다.
B 피디는 다양한 유형의 신박한 발언들을 자주 했는데,
예를 들면
"작가님, 제가 인스타 DM을 보내는 법을 몰라서요ㅠㅠ 혹시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ㅠㅠ"
- 인터넷이 괜히 정보의 바다일까, 그냥 차라리 나보고 하라고 했으면 그냥 했을 텐데. 본인이 해보려고 했지만 방법을 몰라 너에게 묻는다는 식으로 말을 하며 자신의 노력(?)을 어필하려 했던 걸까? 핑프... 아니세요?
"리포터가 야외에서 클로징 멘트 하기 싫다고, 차에서 후시 녹음 식으로 멘트 따자고 해서 그렇게 땄네요."
- 출연자가 결과를 책임져 주는 게 아닌데, 현장 컨트롤을 해야 하는 사람이 그런다고? 줏대도 없이 그냥 대충 출연자 말을 따라버린다고?
"작가님, C 선배 완전 골 때리네요ㅡㅡ;; (들입다 욕한 뒤) 이걸 이렇게 수정하라는데요?"
"..." (카톡 답장 안 해줌)
"수정하겠습니다."
- C 피디님의 앞에서는 세상 깍듯하고 말 잘 듣는 이미지를 구축해 놓은 B이다. 그놈의 찍찍(ㅡㅡ)과 땀땀(;;) 그만 좀 써라!
B 피디와의 거의 모든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화법을 가진 사람.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 책임을 면피하며 남 탓을 하는 사람.
앞뒤가 다른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들을 알고 있다.
작가는 일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고 말하던 작가님.
-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꼰스럽다 생각했지만 섭외 거절이 계속될 때마다 어쩐지 이 말을 떠올리게 됐다.
풋내기인 내 글 앞에서 본인의 영상이 부끄러워진다며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피디님.
- 막상 나는 그에게 묻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일을 시작하려는 나에게)
네가 해야 할 일은 분명 어렵다, 하지만 문은 두드려 봐야 열리는 거 아니겠냐고 말해주던 작가님.
마음은 무 자르듯 선명해졌다. 20대 후반을 이 프로그램에 바치다시피 했지만, 더 이상 난파선의 선장 노릇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 무렵 아마 아이브의 '키치'라는 노래가 나왔을 거다.
난 절대 끌리지 않는 것에 끌려가지 않아
가슴이 웅장해졌다. 나는 그렇게 퇴사를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 어떤 유형의 인간을 싫어하세요?"
"예의 없는 사람이요. 해보기도 전에 못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요."
그래요.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