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엔 3일 연속 약속이 있었고, 그중에 두 건은 내가 신이 나서 주최한 약속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가 쪽쪽 빨리고 돌아왔다. 주말 내내 밖을 나가지 않다가 겨우 일요일 저녁이 돼서야 기운이 났다. 집 밖을 나오지 않는 동안은 거의 <하트시그널 4>를 보고 2023 젊작을 읽었다.
그리고 열심히 우울해했다. 나는 뻑하면 잘난 척이면서-여기서 잘난 척은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 게 옳다고 여기는 습성- 다른 사람들 말에 왜 이렇게 잘 휘둘릴까. 아니면 또 시작된 건가, 그 어떤 말이든 화살이 되어 비수로 꽂히는 자격지심의 시기?
발단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3일 연속 약속의 마지막 날.
약속 장소에 갔더니 원래 모이기로 했던 멤버보다 한 명이 더 있었다. D 피디님.
D 피디님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희박하다. 나와의 인연이라고 한다면 작년 송년회 때 같은 테이블에서 얘기를 나눴다는 정도, 그가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서인지 나더러 본인이 키우는 반려동물을 닮았다고 말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선 소소한 화젯거리가 되었다는 정도.
D 피디님도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의외였는지, 어떻게 왔냐고 물었고 나는 초대받았다고 답했다. 그럼 요즘은 어디(어느 프로그램)에 계시냐 물었다.
"저희 집에 있는데요. 주로 집..."
"아하...! 건초 좀 보내드려요?"
풀 뜯어먹는 소리 하시네... (건초는 그의 반려동물이 주로 먹는 먹이라고 한다. 아재 개그의 일환이겠지...)
아무튼 나는 건초 대신 소고기를 먹었고, 자리는 2차로 이어졌다. 인원은 5명에서 4명으로 줄었고, 그 말은 즉슨 테이블 2개에 나눠 앉던 인원들이 테이블 1개에 모여 앉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쩌다 보니 D 피디님 앞에 앉게 되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끼리 모이면 대개 그렇듯이 이야기의 주제는 중구난방이었다. 이리로 저리로 아무렇게나 튀는 탱탱볼처럼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는 이야기들... 이야기 주제는 최근 조연출이 새겼다는 타투였다가, 각자의 쇼핑 유형이었다가, D 피디님이 키우는 반려동물의 이모저모였다가, 촬영 가서 받아온 고사리를 이제야 무쳐 먹었다는 일화 등등으로 넘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내 '백수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D 피디님은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냐고 물었고, 나는 하기 싫은 프로그램들은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은 딱히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무기력한 답변은 세상 처음 듣는다고 했다.
나도 안다. 청자를 고려해서 대충 둘러대는 답변을 빨리 찾아야 했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솔직함은 늘 약점이 됐다. 나는 그 문제 발언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기 위해 여러 말을 했는데, 그 말들은 모조리 후회하고, 그냥 처음부터 시사교양이요-라고 말을 했어야 했다.
아니 그러니까... 사실 저는 그냥 할 수 있겠다는 마음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반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다는 건데요. 아무튼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없어서 필라테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제가 태어나서 운동이라는 걸 해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주에 3번은 가려고 하는데... (필라테스 몇 회라고? 30회요. 30회 다 하고 얘기합시다.)
이야기는 계속 헛바퀴를 돌았다.
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방송 작가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른 글을 쓰는 게 훨씬 더 재밌는데, 방송은 사실 매번 비슷비슷한 글을 쓰잖아요, 아니 그렇다고 재미없다는 건 아니긴 한데, 아무튼 방송은 글을 쓰며 꼬박꼬박 나오는 페이를 받을 수 있으니까 아예 그만둘 순 없죠... (알겠어요, 30회 끝나고 얘기하자고요.)
그러니까 D 피디님은 이 일에 있어 돈이 우선시되면 안 된다고 재미와 돈이 있으면 재미가 조금이라도 커야 한다고 했다. 51:49는 되어야 한다고. (이 부분에선 동감이다.) 나도 당연히 재미가 우선이라고 했다. 내가 쥐꼬리만 한 돈을 버는데, 이걸 돈을 보고 하겠냐고...
그냥 나는 좀 쉬고 싶었다고, 다시 우악스럽게 말한다. 얼떨결에 방송작가가 된 일부터, 나는 이 일을 좋아하게 된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야기, B 피디와 함께 일하다 보니 일할 의욕이 떨어졌더라는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다음 스텝은 좀 더 신중하고 싶다는 이야기. (왜 얘기할수록 얘기가 꼬이는 것 같지?)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차치하고, D 피디님은 내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없다는 말만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내 나이가 적지 않은데 앞으로의 방향도 세우지 않으면 어떡하냐면서, 일은 쉬는 기간 없이 바로바로 하는 게 좋다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나는 그의 앞에서 철없고 꿈 없는 MZ가 되어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의 말이 맞았다. 아니다, 그의 말은 다 맞았고 나 역시 생각하던 것이었고 그냥 나는 뼈 맞아서 순살 된 게 마음이 아팠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D 피디님이 말한 것은-분하고 좀 재수도 없지만-틀린 말이 없었다. 다만 어른들은 쉬는 시간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게 서러웠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상태를, 왜 나는 견디고 있는데, 본인들이 못 견뎌 안달일까. 일주일 내내 일에 시달리다가 집에 가면 애가 사온 야행성 반려동물을 봐주느라고 잠도 못 자고, 고사리를 무쳤더니 아내에게 왜 이렇게 많이 무쳤냐는 이야기를 들으며 산다고, 본인 인생이 그렇게 고달프다고 하면서, 쉬는 시간을 비난하다니... 모순이다. 여러분, 쉬는 시간은 신이 만든 시간이래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살면 나의 모든 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게, 그럼에도 번번이 다 실패하는 게 너무 애처로워서, 집에 가는 길이 유독 피곤했다.
지하철을 탔는데 이모가 카톡이 왔다.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여수를 갔는데, 내가 머물던 숙소 바로 밑 독채 펜션에서 촬영을 했나 보더라는 얘기였다. 곧이어 이모는 TV 화면을 찍어 보여줬는데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모습에, 꼭 고향집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여수에서 이모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다시 재생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스크롤을 올려 이모가 아침에 보낸 카톡을 봤다. 비몽사몽 간에 확인했던 사진 한 장.
'백수는 명랑하게 사는 것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
이모가 그은 밑줄이 위로가 됐다. 이모는 요즘은 무얼 하며 어떻게 지내냐 묻지도 않고, 그저 명랑하게 살라고 말을 한다. 그것도 내가 아주 좋아하는 방식으로.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상황이 다 위로 같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모는 하필 그날 아침에 이 문자를 보냈고, TV에서는 여수가, 그것도 우리가 머물던 숙소가 나왔다.
다만 그 위로는 좀 늦게 도착했다. 나는 위로가 먹히는 몸일 때가 있고 안 먹히는 몸일 때가 있는데, 어제까진 잘 안 먹히는 몸이었다. 엊저녁까지 웅크린 채로 쭈구리로 살다가 이제야 홍대의 한 카페로 나와 신이 만든 시간을 누린다. 백수는 명랑하게 사는 것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 했으니, 우울해하지 말고 우웅~ 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