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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Mar 02. 2022

호호호

22.02.28-03.02

1.  여행을 계획할 때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해시태그 후 지역의 이름+책방을 검색하는 일이다. 숙소와 음식점 정보는 신랑이 알아서 1-5순위까지 짜준다. 내가 고른 책방 근처 위주의 맛집과 커피숍을 알아본다. 그렇게 한 지역을 알아가는 각자의 방식을 결합해 우리의 여행루트는 완성된다. 2월 방학을 맞아 하동+ 남해로 여행 가기로 했다. 오미크론(코로나) 감염이 이렇게 창궐하지 않을 때, 아이의 혓바늘이 심각하지 않을 때 예약해둔 여행이었다. 당일까지도 여행은 취소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오후 3시에 예기치 않게 하동-남해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은 예상한 바와 같이 매우 험난했다. 혓바닥의 상처가 쓰라려 매일 밤 울고 음식을 넘기지 못해 절규하다가도 아이는 장난을 치고 재밌게 놀았다. 아이 컨디션 오르막 내리막에 같이 덩달아 움직이다 낮잠이 들면 나도 같이 잠이 들었다. 눈을 떠서 잠시 정신을 차리는 사이 신랑이 핸드폰을 건넨다. "여기 지금 가볼래?" 내가 찾아둔 남해의 "아마도 책방"이다. 10분 거리라고 한다. 아이는 잠든 지 1시간이 안 됐다. 당연히 가야 하는 타이밍이다. 

 책방을 혼자 여유롭게 둘러본 30분은 힘든 여정의 충전 시간이 되어주었다. 책방을 돌아보다 산 책은 윤가은 감독의 <호호호>이다. 영화 <<우리들>>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교과서 같은 영화라, 영화를 만든 감독의 글이라면 읽어보고 싶은 게 당연한 수순 이리라. 이런 배경을 차치하고 책을 고른 이유는 다른 2가지가 더 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프롤로그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글쓰기의 동력은 무엇이었는지 매의 눈으로 찾는다.


그 수많은 좋아하는 마음들이 결국 나를 영화로 이끌었다는 것. 그러니 이제 더는 그 마음들을 내 안에서 밀어내지 않으려 한다. 그 모든 좋아하는 마음들을 꼭 끌어안고 더 즐겁고 활기차게 달려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호호호> 윤가은


 프롤로그 마지막쯤에 있는 문장을 읽고, 책을 덮어, 계산하러 갔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수많은 좋아하는 마음을 찾아보고, 감독님처럼 글을 써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좋아하는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 분명 나의 마음속에 있는 리스트가 둥둥 떠오를 게 분명하니까. 두 번째로 책을 고른 이유는 초판 출판 날짜다. 내 생일인 2월 5일과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숫자에 불과하지만, 구매를 합리화할 수 있는 타당한 우연이었다. 

2.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마음을 찾으려고 읽어 가는 과정에서 의도치않게 내 직업에 대한 의미를 찾았다.  앞에 등장한 좋아하는 마음들이 담긴 꼭지는 웃으며 봤고 맨 마지막 꼭지인 <걸어서 걸어서>를 읽으면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눈에 띌 만한 재능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로 시작하는 감독님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읽혔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서 나름 잘 친다고 생각했는데 대회를 나간 게 바이올린 반주자로만 가능했다는 사실, 그림도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그저 열심히 하는 아이죠"라는 학부모 상담 이야기를 들었던 사실, 공부도 잘하는 줄 알았는데 밤새 공부한 나와 밤새 만화책을 읽었다는 친구의 성적 차이를 발견했던 사실 등이 떠올랐다.(친구가 월등히 좋았다) 윤가은 감독님이 쓴 "설명하기 힘든 묘한 황망함"마음이겠지. 딱히 못하지도 잘하지도 않으며 많은 것을 배워온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학창 시절 내가 보기에 노력을 나보다 덜 하는 친구의 성적이 더 높은 것에 열등감을 가졌다. 대학 원서를 쓸 때,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고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구체화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잘하는 것을 찾아 헤맨 여정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동요 정도는 반주를 맞춰 피아노 연주할 줄 알았고, 그림 그리는 법도 체계적으로 배워 아이들에게 배운 대로 가르칠 수 있었다. 운동도 마찬가지였고. 공부도 안달복달 열심히 했고, 남들보다 몇 시간 더 해야 나오는 성적 때문에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도 스스로 알아내려 노력헀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서 나오는 아이디어들이 내가 배웠던 방법들을 떠올렸고, 이것이 나의 밑천이 되었다. 잘하지 못하지만 열심히 했던 사람이 느끼는 '황망함'이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기에 교실에서 공부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이들 편에 설 수 있었다. 남해 여행 갔다 데려온 책은, 복직을 앞둔 나에게 직업의 의미를 찾게 해 준 책이 되었다. 책도 인생의 여정과 함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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