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풍광과 대지의 포효.
(1) 끝없는 팜파스를 지나 빙하의 도시 엘 칼라파테로
칠레 여행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 빙하의 도시, 엘 칼라파테(El Calafate)로 향했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끝을 알 수 없는 평원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이름도 생소해 무작정 외웠던 아르헨티나의 대평원 '팜파스'가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린 시절 품었던 막연한 궁금증은 바다처럼 넓은 광활함 앞에 기가 질릴 정도의 경외감으로 변했다. 몽골의 대초원보다도 더 광활하게 느껴지는 대지였다.
칠레의 평원과 비슷해 보였지만, 이곳은 도로를 따라 나무 말뚝과 철조망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 광활한 땅에도 주인이 있는지, 평원은 철조망에 의해 조각조각 구획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소와 말, 그리고 라마(Llama)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 이면에는 처연한 죽음도 있었다. 도로 옆 철조망에는 가끔 죽은 라마가 걸려 있었다. 자유롭게 평원을 달리다 도로 쪽으로 나오려던 라마가 철조망에 걸려 목숨을 잃은 듯했다. 군데군데 보이는 그 가여운 모습들에 마음이 아려왔다.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선이 야생의 생명에게는 치명적인 덫이 되어버린 셈이다.
서너 시간 동안 황량하고도 처연한 팜파스를 지나 드디어 엘 칼라파테에 들어섰다. 도시는 활기로 가득했다. 거리 곳곳의 식당 유리창 안에는 어린 양을 통째로 굽는 아르헨티나식 바비큐, '아사도(Asado)'가 전시되어 있어 목축 대국 아르헨티나의 위용을 뽐냈다.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해 양 바비큐를 맛보며 비로소 아르헨티나에 입성했음을 실감했다. 식사 후 인근 여행사를 찾아 내일 있을 빙하 투어를 예약했다. 빙하 위를 걷는 트레킹부터 배를 타고 접근하는 투어까지 선택지가 다양했다. 나는 거대한 빙하의 위용을 가장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선상 투어를 선택했다. 내일 마주할 푸른 빙하의 신비로움을 기대하며 아르헨티나에서의 첫 밤을 맞이했다.
(2) 순백의 신부를 만나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의 경이
설레는 마음으로 빙하 투어에 나섰다. 미니버스가 엘 칼라파테 숙소 곳곳을 돌며 여행객들을 실어 나르는 동안, 의도치 않게 마을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재미를 누렸다. 약속 시간 전부터 나와 기다리는 모범생 여행자부터, 기사가 직접 방까지 찾아가 깨워야 간신히 뛰어나오는 게으름뱅이 여행자까지...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을 지켜보는 것도 배낭여행이 주는 쏠쏠한 묘미다. 빙하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자연보호구역이었다. 투명한 빙하 호수 너머로 야생 라마와 이름 모를 새들이 평원을 뛰노는 모습에, 내가 비로소 문명을 벗어나 생생한 야생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실감했다.
선착장에 도착해 배를 타고 드디어 페리토 모레노(Perito Moreno) 빙하로 향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던 펜팔 소녀를 처음 만나는 것처럼 가슴 벅찬 설렘으로 다가왔다. 지금껏 알프스의 샤모니와 융프라우, 코카서스의 만년설, 그리고 볼리비아 라파스 주변의 고산 빙하까지 꽤 많은 빙하를 보아왔다. 여타 산악 빙하들이 흙과 바위가 뒤섞여 그 형체가 흐릿했던 것과 달리 이곳 모레노 빙하는 달랐다. 티 한 점 없는 순백의 자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어 마치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신부처럼 아름다웠다. 거대하면서도 정결한 그 모습 앞에서 나는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혔다.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집채만 한 빙하 붕괴는 보지 못했지만, 정적을 깨고 '우지끈' 소리를 내며 얼음 파편이 튀어 오르는 모습은 충분히 강렬했다. 선상 투어가 빙하의 푸른 속살을 지근거리에서 들여다보는 탐험이었다면, 이어지는 전망대 산책은 빙하의 장엄한 전체상을 조망하는 명상의 시간이었다. 수천 년의 시간을 머금고 산 정상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와 호수에 맞닿아 거대한 절벽을 이룬 얼음 폭포의 장관. 나는 전망대 한쪽에 앉아 오랜 시간 그 푸른빛이 감도는 백색의 장벽을 바라보았다. 그 신비로운 형상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내 기억의 회로 속에 깊이 각인시키며, 파타고니아가 허락한 최고의 선물을 만끽했다.
(3) 신전의 기둥을 영접하다: 엘 찰텐과 피츠로이의 장엄함
페리토 모레노 빙하의 여운을 뒤로하고, 파타고니아의 정점이라 불리는 피츠로이(Fitz Roy)의 관문, 엘 찰텐(El Chaltén)으로 향했다. 엘 칼라파테에서 엘 찰텐까지 이어진 서너 시간의 여정은 그 자체가 거대한 대자연의 파노라마였다. 푸른 하늘보다 더 짙푸른 호수, 비현실적으로 떠 있는 예쁜 구름, 그리고 저 멀리 만년설을 머금은 산들까지.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놓칠까 봐 차마 창밖에서 눈을 뗄 수도,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엘 찰텐의 숙소는 주방이 딸린 호스텔이었다. 이층침대에서 대여섯 명이 함께 지내는 불편함 정도는 여행의 일부였다. 오히려 여행 중 처음으로 만난 번듯한 주방 덕분에 호사를 누렸다. 아르헨티나의 명물인 소고기 등심을 사다 마음껏 구워 먹은 것이다. 100g에 단돈 만 원(당시 환율 기준) 남짓한 착한 가격에, 입안에서 녹아내리던 그 부드러운 육질의 맛은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일만큼 일품이었다.
이튿날, '불타는 고구마(일출 때 붉게 달아오르는 피츠로이)'를 보는 것이 버킷리스트인 열혈 일행 3명은 새벽 2시에 길을 나섰다. 나는 나만의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피츠로이로 향했다. 피츠로이로 가는 길은 차마 '어디가 가장 예쁘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만큼 절경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피츠로이 발치에 펼쳐진 평원은 압권이었다. 산 정상에서 내려온 빙하수가 실핏줄처럼 갈래갈래 흩어져 키 작은 나무숲 사이를 흐르고, 저 앞에는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치는 신전의 기둥처럼 솟아 있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 속의 신비로운 평원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 채 보낸 그 한 시간은 이번 여행 중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신전의 입장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마지막 '깔딱 고개'는 온몸의 기운을 다 바쳐야 할 만큼 험난한 고행길이었다. 몇 번이나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땀을 쏟아낸 뒤에야, 마침내 장엄한 신전의 기둥과 대면할 수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친 거대한 암봉과 그 아래 펼쳐진 눈 덮인 호수, 그리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몰아치는 강한 바람은 이곳이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비의 세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이 거대하고 경건한 장소에서 또다시 마음을 모았다. 이번 여정의 끝까지 지켜줄 안전과 내 주변 소중한 이들의 행복을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올렸다. 하산하는 길, 나는 이 눈부신 풍경을 머릿속에 영원히 박제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아주 천천히, 느릿한 걸음을 옮기며 파타고니아의 심장부를 눈에 담았다.
(4) 세상의 끝에서 맛본 장엄한 등심과 비글 해협의 바람
피츠로이의 장엄함을 뒤로하고 엘 칼라파테 공항을 통해 지구 최남단의 도시, 우수아이아(Ushuaia)로 향했다.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공항 입구부터 계류장, 심지어 항공기에 오르는 사다리까지 온통 LG 로고로 도배된 광경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이번 여행 중 남미 곳곳에서 마주친 삼성, LG, 현대의 위상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타국 땅 끝자락에서 만난 우리 기업의 이름에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국뽕'이 차올랐다.
우수아이아 공항에 내리니 알싸한 한기가 몸을 감쌌다. 남반구의 끝이라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겨울에 가까워지는 법이다. '세상의 끝'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도시를 감싼 야트막한 산줄기들은 하나같이 하얀 눈을 머금고 있었다. 이번 숙소는 주방이 딸린 아파트였다. 우리는 엘 찰텐에서 맛본 아르헨티나 등심의 감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곳의 고깃값은 그보다 더 저렴했고, 고기의 두께는 무려 손바닥 두 개를 겹쳐놓은 것만큼이나 두툼했다. 아르헨티나는 내게 장엄한 대자연의 국가이자, 동시에 '장엄한 등심'의 나라로 영원히 기억될 것 같았다.
다음 날 투어 역시 '8인 단체 현금 결제'라는 전천후 협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가의 30%를 기분 좋게 깎아 비글 해협(Beagle Channel)행 배에 올랐다. 배는 바다사자와 마젤란 펭귄의 서식처를 유영했다. 볼리비아 고원 사막에서 플라밍고 떼를 보며 느꼈던 그 순수한 감동이 다시금 밀려왔다. 동물원에서나 보던 신기한 동물들이 눈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모습은 언제나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젤란 펭귄의 숫자였다. 아직 남극에서 돌아오지 않은 녀석들이 많아, 해변을 꽉 채운 장관 대신 가마우지와 갈매기들이 빈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펭귄 수보다 관광객을 가득 태운 배가 더 많아 보이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졌다. 선장들은 펭귄 몇 마리를 찾아 부지런히 배를 몰며 아쉬워하는 관광객들을 달래기에 바빴다.
비록 펭귄 떼는 보지 못했지만, 비글 해협 항해는 그 자체로 특별했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세상의 끝'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보이는 등대도 세상의 끝 등대였고, 멀리 보이는 마을도 세상의 마지막 마을이었다. 나는 배 갑판 위로 올라가 매서운 찬바람과 물보라를 정면으로 맞았다. 이 세상이 끝나는 지점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황량하고도 고결한 풍경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았다.
(5) 파괴된 숲의 탄식과 세상 끝의 뒷산, 마르티알 빙하
우리의 여행 목적은 명확했다. 이름난 관광지를 훑기보다는 대지의 속살을 직접 밟는 '트레킹' 위주이다.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에서도 우리는 도시 뒤편에 자리한 빙하 공원(마르티알 빙하)을 걷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담했다. 스키장 건설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길을 내고 슬로프를 닦느라 아름다운 숲과 길들이 사정없이 파괴되어 있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개발의 필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나, 무참히 난도질당한 자연의 상처를 마주하니 못내 아쉽고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흉물스럽게 밀려 나간 슬로프를 따라 묵묵히 산을 올랐다. 다행히 정상 부근은 아직 야생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빙하 공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치고는 작고 소박한 얼음 덩어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단체로 소풍을 온 현지 학생들이 그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눈썰매를 타는 모습이 정겨웠다.
이미 토레스 델 파이네의 압도적인 삼봉과 피츠로이의 장엄한 신전을 대면하고 온 내 눈에는, 이곳이 고작 동네 뒷산 언저리보다 못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 산 위에서 고개를 돌리자 비글 해협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끝을 흐르는 그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물길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산을 오르며 느꼈던 아쉬움은 이내 충분한 만족감으로 바뀌었다.
(6) 부자 나라의 품격과 예술의 향기: 부에노스아이레스 4일간의 산책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를 떠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공항에 내리는 순간, 계절의 마법이 펼쳐졌다. 방금까지 하얀 눈을 머금은 산 아래서 서늘한 공기를 들이켰는데, 이곳은 완연한 여름의 열기로 가득했다. 같은 나라 안에서 계절을 넘나드는 경험은 대륙급 국가 아르헨티나가 주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따로 또 같이' 하는 여행 카페의 방식이다. 도시 간 이동과 숙박은 함께하며 안전을 확보하되, 도시에 머무는 4일 동안은 각자의 취향에 맞춰 흩어졌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이 방식 덕분에 나는 15개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며 익힌 나만의 도시 탐구법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요즘 세상은 여행자에게 참으로 친절하다. 나는 AI에게 최적 동선을 묻고, 그중 내 취향에 맞는 장소들을 골라냈다. 첫날 교통카드를 구입해 버스에 올랐다. 구글 지도를 보며 현지인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유명 관광지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진짜 표정인 '생활 문화'를 자연스레 체험하게 된다. 치안이 불안했던 칠레 산티아고와 달리,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고 평온하여 도시 구석구석을 훑는 즐거움이 컸다.
한때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었던 영광은 도시 곳곳에 진한 흔적을 남겨두었다. 격조 있는 건물과 잘 정비된 도로는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에 못지않은 우아함을 뽐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처럼, 거리의 조형물과 예술품들은 여전히 부유했던 시절의 품격을 증명하고 있었다. 특히 광활한 영토만큼이나 시원하게 뻗은 공원들이 인상적이었다. 에코 공원과 장미 공원은 무료임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가꾸어져 있었고, 그 너른 품은 여행자에게 편안한 쉼터를 제공했다.
국립미술관 또한 경이로웠다. 입장료가 없는데도 고흐, 고갱, 렘브란트 등 거장들의 진품들이 즐비했다. 아마 100년 전 부유했던 시절에 사들인 예술적 자산들이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대가들의 작품 앞에 앉아 긴 시간 예술의 향기에 젖었고 결국 두 번이나 박물관을 찾았다.
공원 곳곳에서는 야외 레스토랑이 열리고 탱고 댄서들이 열정적인 춤사위를 뽐냈다. 무심히 공연을 보다 댄서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즉시 팁을 요구하는 이곳만의 '눈 맞춤 규칙'을 배운 뒤로는, 나도 모르게 곁눈질로 공연을 감상하는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 하나로 꼽히는 '엘 아테네오(El Ateneo)'에서는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한강 작가의 번역본이 당당히 꽂혀 있는 것을 본 순간, 가슴속에서 뭉클한 자부심이 차올랐다. 삼성과 LG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노벨 문학상 작가를 보유한 우리 문화의 힘이 지구 반대편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한국 식당이 많은 덕분에 그동안 굶주렸던 한국 음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웠고, 나는 이 격조 높은 도시의 낭만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7) 사진보다 더 매혹적인 실물, 이구아수 폭포의 포효
탱고의 선율이 흐르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또 다른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마주하기 위해 푸에르토 이구아수(Puerto Iguazú)로 향했다. 이구아수 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에 걸쳐 있어 두 나라에서 보는 맛이 제각각 다르다. 북미의 나이아가라 폭포가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걸쳐 있는 것과 흡사한 형세다. 나의 여정은 아르헨티나 쪽 폭포를 먼저 감상한 뒤 브라질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이구아수 폭포 역시 그간 수많은 사진과 영상으로 접하며 그 웅장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폭포로 향하는 내 마음은 다시금 젊은 시절 펜팔 하던 이성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렘으로 일렁였다. 마침내 마주한 폭포는 기대 이상이었다. 흔히 말하는 '화장발'이나 '뽀샵'이 아니었다. 그간 화면으로 봐왔던 모습보다 실물은 수만 배 더 매혹적이고 강렬했다. 시각을 압도하는 거대한 물줄기에 더해, 고막을 울리는 우렁찬 폭포 소리와 온몸을 적시는 시원한 물보라는 이 '실물 미인'의 매력을 극대화해 주었다.
이구아수 폭포의 심장이라 불리는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으로 향했다. 인산인해를 이룬 악마의 목구명 전망대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대지의 진동이 발끝으로 전해졌다. 기다림 끝에 서게 된 전망대 끝자락, 거대한 물줄기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광경은 공포와 경외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포효하는 악마의 목구멍 앞에 서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미미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나는 그 장엄한 물보라 속에 서서, 자연이 뿜어내는 날 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8) 이구아수의 밤, 인간의 온기가 빚어낸 축제의 거리
낮 동안 이구아수 폭포의 거대한 포효에 온몸을 떨었다면, 저녁의 푸에르토 이구아수는 여행자들을 위한 따스한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숙소를 나서 여행자 거리(Avenida Brasil 주변)로 향했다. 이삼백 미터 남짓 길게 늘어선 식당과 카페들은 저마다의 불빛을 밝히며 전 세계에서 모여든 이방인들을 유혹했다. 거리의 풍경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축제였다. 가벼운 옷차림의 여행자들이 시원한 맥주잔을 기울이며 이구아수의 밤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해외 도시의 번화가를 다녀보았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유독 특별했다. 흥겹고 활기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정겹고 따뜻했으며, 묘하게 관능적인 활력이 거리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거리 한복판, 악사가 연주하는 애절한 탱고 선율에 맞춰 전문 댄서들이 화려한 스텝을 밟았다. 그들의 몸짓에 매료된 여행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리로 나와 서툰 솜씨로 탱고를 추며 흥을 더했다. 춤추는 이들과 구경하는 이들 모두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전염시키기에 충분했다. 놀라운 점은 이토록 많은 인파가 모인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란스럽거나 무질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는 기분 좋은 소음이 되어 밤공기를 채웠다. 나는 그 정겨운 풍경 사이를 천천히 오르내리며, 대자연이 주는 경외감과는 또 다른 '사람이 주는 위로'를 마음껏 음미했다.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폭포를 품은 도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