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부러워하는 여행작가로 3년
1. 대통령도 부러워한 직업, 여행작가
2022년 말, 정든 직장을 떠나며 나는 남은 여생을 '여행작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평소 글쓰기를 즐겼고, 여행을 사랑했으니 이 두 가지를 합치는 것은 내게 운명과도 같았다. 좋아하는 여행을 마음껏 하며, 그 감흥을 글로 남기는 삶. 키보드 두들길 수 있는 힘만 있다면 평생 현역으로 살 수 있는 이보다 더 매력적인 일이 또 있을까.
작년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후보가 유튜브에 출연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다시 태어나도 정치를 하겠습니까?"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다시 태어나면 여행작가를 하고 싶습니다." 왜 여행작가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여행하면서 글 쓰는 일, 얼마나 멋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나는 그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꿈꾸는 이조차 다음 생에나마 꼭 해보고 싶어 하는 꿈의 직업.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그토록 매력적인 길이라는 사실에 가슴 벅찬 자부심과 뿌듯함이 밀려왔다.
2. 10년의 약속: 100개국 여행과 50개 도시 한달살이
퇴직과 동시에 나는 ‘야간비행’이라는 필명을 걸고 여행작가의 삶을 시작했다. 여행작가는 방 안에 앉아 상상으로 글을 짓는 사람이 아니다. 흙먼지 날리는 길 위에서 생생한 현장을 기록해야 한다. 첫 배낭을 꾸리기 전, 나는 나 자신과 약속했다. "65세 퇴직 후 75세까지, 향후 10년간 100개국을 여행하고 그중 50개 도시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글을 쓰겠다. “
건강하게 해외를 누빌 수 있는 마지노선을 75세 정도로 잡았고, 100개국이라는 숫자는 내 도전의 상징적인 목표였다. 50개 도시 한달살이 역시 1년에 5곳 정도는 깊게 머물러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물론 이 숫자들이 나를 옥죄는 족쇄는 아니다. 계획이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흐르는 법. 건강이 허락지 않는다면 언제든 멈출 것이고, 반대로 다리가 튼튼하다면 80세가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오늘 내 발걸음의 경쾌함이다.
1. 여행은 쉽지만, '살기'는 두렵다?
퇴직 전에도 수차례 패키지와 자유여행을 경험했기에, '10년간 100개국 여행'이라는 목표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여행 카페에서 마음 맞는 동행을 구하고 부지런히 비행기에 오르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50개 도시 한달살이'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과 머물러 사는 삶은 엄연히 다르다. 집은 어떻게 구할 것이며, 낯선 해외에서 무엇을 먹고, 혼자서 긴 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무엇보다 한정된 퇴직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이 장기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과 현실적인 고민이 앞을 가로막았다.
2. 예행연습: 서귀포에서의 한 달
나는 돌다리를 두드려 보기로 했다. 첫 실험 무대는 제주도였다. 해외로 나가기 전, 하루 일과를 어떻게 채우고 식사와 예산은 어떻게 관리할지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달살이 전용 앱으로 숙소를 구하고 서귀포로 향했다. 막상 살아보니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미 서울에서 몇 년간 혼자 살고 있었기에, 장소만 바뀌었을 뿐 생활의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생소한 지역이라는 낯섦도 잠시, 며칠이 지나자 나는 금세 서귀포 시민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나의 하루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아침은 서울에서처럼 늘 먹던 누룽지에 과일, 계란, 요플레로 가볍게 해결했다. 식사 후엔 백팩에 노트북을 짊어지고 서귀포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쾌적한 도서관에서 오전 내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점심은 저렴하고 맛있는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오후 서너 시쯤 귀가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올레길을 2만 보 정도 걷는다. 땀을 흘린 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마트에 들러 장을 봐서 귀가하는 것이 일과였다. 하루의 마무리는 유튜브 보면서 맥주 한 캔으로.
돈도 별로 들지 않았다. 매일 점심, 저녁 외식비와 장보기 비용을 합쳐 하루 3만 원이면 충분했다. 외로울 틈도 없었다. 카톡으로 가족, 친구들과 수시로 수다를 떨었고, 가끔 숙소 여주인과 와인을 기울이며 대화하다 보니 오히려 서울보다 더 풍요롭고 즐거운 생활이 이어졌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내게 확신을 주었다. "외국에 가서도 딱 이렇게만 살면 되겠구나. “
3. 첫 해외 실전: 익숙한 낯설음, 삿포로
제주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첫 해외 한달살이 도시를 물색했다. 선택은 일본 삿포로였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1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어 언어가 통하고 문화가 익숙하며, 혹시 모를 비상사태 시 즉시 귀국이 가능한 거리라는 점이 주효했다. 삿포로에서의 삶도 제주와 판박이였다. 아침 식사, 오전의 글쓰기, 점심, 오후의 2만 보 걷기, 그리고 저녁의 혼술까지. 나의 루틴은 국경을 넘어서도 완벽하게 작동했다. 오히려 언어가 통하니 숙소 주인의 차를 얻어 타고 함께 온천을 다니고 숨은 초밥 맛집을 찾아다니며 현지인처럼 녹아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 홀로 버스투어 중 옆자리에 앉은 일본인 여성관광객과 친구가 되어 함께 여행하는 행운까지 찾아왔다.
4. 유목민 DNA의 재발견
제주와 삿포로, 두 번의 한달살이를 마치며 나는 내 안에 잠재된 '유목민 기질'을 발견했다. 서울의 번듯한 집에서 익숙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안정된 삶보다, 조금 열악한 숙소일지라도 낯선 곳에서 홀로 부딪치며 그때그때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삶이 내 적성에 딱 맞았다. 나는 정착해서 시들어가는 식물이 아니라, 바람 따라 흘러가며 뿌리내리는 홀씨 같은 존재였음을, 예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1. 계획적인 유목생활, 그리고 장남의 의무
제주와 삿포로에서의 예행연습을 마친 후, 나의 해외 한달살이는 순풍을 탄 돛배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10년간 100개 국가 여행, 50개국에서 살아보겠다는 목표는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여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과제였다. 유목민이 가축의 먹이를 찾아 계획적으로 이동하듯이, 나의 유목민 생활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첫 번째 원칙은 '계절과 동선의 최적화'다. 더울 때는 시원한 북쪽으로, 추울 때는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하여 쾌적함을 유지하되, 비용 절약을 위해 한 번 출국하면 인근 국가 두세 곳을 묶어서 이동했다. 시기에 따라 변하는 항공권, 숙소 비용과 유럽 셍겐조약 국가들의 체류 기간도 고려해야 했다.
두 번째는 '현실과의 타협'이었다. 아무리 자유로운 방랑자라 해도 끊을 수 없는 끈이 있다. 위암 시술 후 매년 3월 말이면 반드시 귀국해 추적 검사를 받아야 했고, 장남으로서 12월 부모님 제사를 주관해야 했다. 그래서 12월 제사를 모시고 출국했다가 3월 검진 직전에 귀국하는 패턴을 정착시켰다. 다행히 설(구정)과 추석 차례는 아들에게 위임하여 명절 귀국의 의무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2월과 9월에도 귀국하거나 부모님 영정사진을 들고 세상을 떠돌아야 했을 것이다.
2. 중간 결산: 16개 도시 정복, 34개 도시 남았다
이러한 원칙 아래, 나는 지난 3년간 쉴 새 없이 짐을 풀고 쌌다. 제주와 삿포로를 시작으로 동남아의 치앙마이, 쿠알라룸푸르, 냐짱, 비엔티안, 프놈펜, 발리, 타이베이에서 땀을 흘렸고, 유럽으로 넘어가 프라하, 이스탄불, 부다페스트, 비엔나의 낭만을 즐겼다. 차마고도의 거친 숨결을 지나 몽골 울란바토르와 조지아 트빌리시의 바람을 맞았으며, 지금은 인류 문명의 기원, 이집트 카이로에 닻을 내리고 있다.
현재까지 성적표는 16개 도시 완료. 목표인 50개 도시까지는 아직 34개가 남았다. 2026년 새해에도 나의 지도는 빽빽하다. 카이로에서의 한 달이 끝나면 튀니지 튀니스,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여정이 기다리고 있고, 이후 포르투갈 리스본, 스페인 바르셀로나, 그리스 아테네, 키프로스, 불가리아 소피아, 북마케도니아 스코페, 알바니아 티라나 등 발칸반도 국가까지 숨 가쁜 '한달살이 릴레이'가 이어질 예정이다.
3. 멈추지 않는 여행: 렌터카에서 배낭까지
한 곳에 머무는 '한달살이'가 나의 베이스캠프라면, 그 사이사이에는 역동적인 '이동형 여행'이 채워졌다. 친구들과 렌터카로 한 달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일주했고, 작년에는 캠핑카를 몰고 50일간 유럽 전역을 누비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여행 카페 회원들과 함께한 여정은 조금 더 야생에 가까웠다. 20일간의 실크로드 배낭여행, 중앙아시아 '탄탄탄' 국가들을 훑은 33일간의 여정, 험준한 차마고도 20일, 그리고 최근 마친 55일간의 남미 배낭여행까지. 내 다리는 쉴 틈이 없었다. 여행과 여행 사이 시간이 애매할 땐 인도와 몽골 패키지여행으로 빈틈을 메웠고, 잠시 한국에 머물 때조차 국내 버스 투어를 다니며 감각을 유지했다.
4. 3년에 900일, 나는 '프로 여행러'다
지난 3년간의 기록을 날짜로 환산해 보니 놀라운 숫자가 나왔다. 대략 900일. 해마다 10개월, 즉 1년 365일 중 300일가량을 집이 아닌 여행지에서 보낸 셈이다. 보통 직장인들이 주말, 공휴일, 휴가로 135일을 쉬고 연간 230일 정도 근무한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매년 300일씩 주말도 반납하고 현장을 누빈 셈이니, 현역 직장인보다 더 치열하게 근무한 '성실한 여행작가'라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팔자 좋게 놀러 다닌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이 여정은 밥벌이보다 더 진지하고 엄숙한 나의 '업(業)'이다.
1.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라는 질문의 아이러니
여행작가라는 명함을 내밀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묻는다. "그래서,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참 난감한 질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대답은 늘 "바로 직전에 다녀온 곳"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의 원천은 '익숙함'이 아닌 '새로움'에 있다 보니, 기억 속의 풍경보다는 지금 내 눈앞의 생생한 감각이 늘 최고의 점수를 받는다.
지금 묻는다면 단연코 지난달 다녀온 '남미'가 최고라고 답할 것이다. 안데스와 파타고니아의 신비로운 대자연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전엔 티베트의 신기(神氣) 어린 풍경을 보여준 '차마고도'가 최고였고, 그전에는 유럽을 누빈 '캠핑카 여행'이 최고였다고 답한다.
그래도 굳이 기억의 창고를 뒤져 '절대적인 최고'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50일간의 유럽 캠핑카 여행을 꼽겠다. 독일에서 시작해 프랑스를 거쳐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 스코틀랜드의 끝단, 하이랜드까지 달렸던 그 길. 다시 도버를 건너 프랑스, 벨기에와 스위스를 돌아 독일로 복귀했던 그 아찔하고도 무모했던 여정은 내 여행 인생의 가장 짜릿한 하이라이트였다.
2. 도시의 품격보다 중요한 것: 사람의 온기
"한달살이 하기엔 어디가 제일 좋은가요?"라는 질문도 많이 받는다. 단순히 '거주 환경'만 놓고 보자면 비엔나나 프라하 같은 소득 높은 선진국 도시들이 좋다. 인프라가 완벽하고 거리가 위생적이라 삶의 질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65세 이상 지공거사들에게는 프라하와 부다페스트가 최고이다. 두 도시는 65세 이상은 버스, 트램, 지하철이 무료이고 근거리 철도마저 무료여서 지공거사들의 천국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최고의 한 달'을 결정짓는 변수는 도시의 인프라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느냐, 즉 '사람과의 인연'이었다. 여행 중 겪는 사건 사고는 당시엔 고통스럽지만 지나면 재미있는 안줏거리가 된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맺은 인연은 당시에도 나를 행복하게 했고, 지나고 나면 더 짙은 그리움과 추억으로 남는다.
3. 나를 다시 길 위로 부르는 이름들
돌이켜보면 나의 한달살이가 외롭지 않았던 건, 그곳에 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와 삿포로에서는 연상의 숙소 여주인들이 마치 누나가 동생 챙기듯 살뜰하게 밥과 정을 챙겨주었다. 그녀들이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함께 맛집과 숨은 명소를 찾아다녔던 기억이 아련하다.
비엔나의 숙소 주인 사비네와는 한 집에서 '동거(?)'하며 현지인의 삶 깊숙이 들어갔다. 우리는 때론 함께, 때론 따로 각자의 삶을 즐겼다. 사비네의 친구들이 놀러 와 함께 차를 마시며, 서로 서툰 영어로 동문서답하면서도 웃음꽃을 피웠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설렘도 있었다. 삿포로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미찌꼬와는 풋풋한 로맨스의 감정을 나누었고, 그 인연은 삿포로를 넘어 서울과 치앙마이에서의 재회로 이어졌다. 비엔티안에서는 30대 호텔 여직원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매달려 맛집을 누볐고, 내 나이를 모르는 그녀로부터 당돌한 청혼을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 베트남 식당에서는 나만 보면 얼굴을 붉히는 계산대 직원과 묘한 '썸'을 타며, 한 달간 늙은 여행자의 심장이 다시 뛰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리고 급기야 베트남에서 만난 조지아 딸내미 안나와는 부다페스트와 트빌리시를 거쳐, 지금 카이로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든든한 여행 동반자가 되었다. 안나의 엄마와 가끔 화상 통화를 하며 "딸을 예뻐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안나의 엄마는 나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50세이다. 나의 방랑자 생활이 아니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이다.
멋진 풍경은 사진으로 남지만, 따뜻했던 사람은 가슴에 남는다. 내가 편안한 집을 두고 계속해서 짐을 싸는 이유는, 어쩌면 저 길모퉁이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인연'을 만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지난 3년간의 여정은 겉보기에 화려하고 자유로웠지만, 내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야간비행'이라는 그럴듯한 필명을 가지고 있어도, 현실의 나는 올해 한국나이 70인 노장이다. 젊은 시절 강철 같았던 몸도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고장 신호를 보내오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병원도 약국도 먼 타지를 장기간 떠도는 일은 그 자체로 커다란 리스크이자 부담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행 내내 참 열심히도 기도했다.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임에도, 여행지에서 신의 거처가 보이면 주저 없이 들어갔다. 그것은 절대자에 대한 귀의라기보다, 나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빌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자 '위안'이었다.
2025년 한 해만 돌아봐도 내 무릎은 쉴 새 없이 굽혀졌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불교 사원, 발리의 힌두교 사원, 이스탄불의 모스크, 헝가리와 비엔나의 고풍스러운 성당, 차마고도의 티베트 사원, 조지아의 정교회, 그리고 몽골의 사원까지. 나는 그 모든 신전에서 약간의 돈을 바치며 고개를 숙였다.
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만든 건물에만 있지 않았다. 이번 남미 여행 중 마주한 이과수 폭포의 굉음 앞에서, 칠레 델 파이네 삼봉과 피츠로이의 거대한 암벽 앞에서, 그리고 페리토 모레노 빙하의 푸른 침묵 앞에서 나는 저절로 두 손을 모았다. 대자연이라는 거대한 성소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기에, 그 경외감은 곧바로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
"부디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 주소서. 내 몸이 버텨주게 하소서. “
어떤 절대자가 내 기도를 들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행위가 나에게 "다 잘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최면을 걸어주었다는 점이다. 불안이 스며들 때마다 올렸던 그 수없는 기도 덕분인지, 나는 지난 3년간 큰 사고 없이 건강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녕 속에 900일의 여정을 이어올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신과 대자연이, 겁 많은 늙은 여행자를 가엽게 여겨 보살펴준 덕분이리라. 이곳 카이로에서도 거대한 신전 피라미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파라오에게 기도할 것이다. 나를 지켜달라고..
1. 기내용 캐리어 하나로 충분한 삶, 그리고 불편함의 미학
길 위에서의 시간이 쌓일수록 내 삶의 부피는 극적으로 변했다. 조그마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세계를 누비다 보니, 살아가는 데 그리 많은 것이 필요치 않음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3개월 해외살이를 위해 챙기는 짐이 기내용 소형 캐리어 하나면 족하다. 억지로 무소유를 실천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길 위에서의 삶은 내 몸에 자연스러운 미니멀리즘을 심어주었다. 욕심이 줄어드니 통장 잔고와 상관없이 마음은 저절로 부자가 되었다.
나는 방랑자이며 여행작가이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자유롭다. 한국이 아닌 세상의 법칙을 따른다. 세상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으면 마음 가는 데로 행동한다. 위선과 관념을 배격한다. 혼자만의 삶에 온전히 만족하다 보니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는다.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고 얘기한다.
여행이 지속되다 보니 어느새 불편함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해외살이건 배낭여행이건 원래 불편함의 연속이다. 처음엔 새로움이 주는 희열이 워낙 커서 그 불편을 '감수'하며 여행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넘어 '즐기고' 있다. 지금 내가 머무는 지저분한 카이로 숙소와 소란스러운 거리에는 불편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그 불편함마저 살아있음의 증거로 즐기고 있다. 나 홀로 삶에 적응하고 결핍과 불편함을 즐길 수 있는 이 태도는, 훗날 내게 닥칠 어떤 상황에서도 내 행복을 지켜줄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2. 친구의 죽음이 가르쳐준 것, 계속되는 2026년의 여정
나의 여정은 2026년에도 멈추지 않는다. 3월 말, 건강 검진을 위한 열흘간의 일시 귀국을 제외하면 나는 10월 말까지 계속 지구 반대편에 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의 사막을 건너 남유럽의 태양 아래를 걷고, 발칸반도의 낯선 골목을 지나 미국 알래스카와 중남미의 열정 속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그 모든 길 위에서 나는 쓰고, 기록할 것이다.
지난달, 누구보다 건강했던 친구의 급작스러운 부고를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은 슬픔을 넘어 서늘한 각성으로 다가왔다. "나중은 없다. 지금 행복해야 한다." 친구의 죽음은 나에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3. 에필로그: 나는 계속 걷는다
900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시간 동안 나는 16개 도시에서 살았고 수많은 나라를 스쳤다. 하지만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칠순에 들어선 내가 여전히 도전하고 있고, 내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뜰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지인이 "언제까지 여행할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내 두 다리가 허락하고, 내 심장이 뛰는 한, 나는 길거리에 있을 것이다."라고 주저 없이 답했다.
퇴직 후 3년,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진짜 주인이 되었다. 여행할 때는 현장의 설렘으로 행복하고, 여행하지 않을 때는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설렘으로 즐겁다.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 삶이 온통 축제다. 이 축제는 배낭을 풀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