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여행자와 26세 미녀의 카이로 한집살이.

2026년 카이로 한달살이 : 환상과 현실 사이

by 야간비행

1. 뿌연 먼지와 소음, 카이로의 민낯을 마주하다

2026년 새로운 해외살이가 시작되었다. 겨울에는 따뜻한 곳으로 떠난다는 나만의 한달살이 방침에 따라, 이번 겨울은 춥지 않은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첫 번째 도시는 이집트의 카이로다. 17년 전 다녀간 곳이지만, 그때는 피라미드 등 거대 유적지 위주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지나간 곳이라 다시 구석구석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그 나라를 가장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1인당 국민소득이다. 국민소득과 그 나라 삶의 수준은 대체로 일치한다. 2024년 이집트의 국민소득은 약 3,500불 수준이었다. 수치상으로는 베트남과 라오스의 중간쯤 되는 위치다.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이며 피라미드를 비롯한 인류 최고의 유산을 보유한 나라이지만, 현재의 모습은 안쓰럽다. 국민들의 생활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도무지 위생 관념이 없다. 반찬가게에 가면 먼지 풀풀 날리는 길가에 뚜껑도 없이 음식을 내놓아 먼지가 내려앉고, 현지인 빵집에서는 돈 받은 더러운 손으로 빵을 집어준다. 숙소에 비치된 주방기구와 설거지 수세미는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듯하다.


카이로 시내는 낡은 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에 사막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로 항상 하늘이 뿌옇다. 도시는 황사가 심한 날 차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건물, 차량, 그리고 나뭇잎마저 누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런 곳에서 마스크 쓰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열악한 곳에서 나는 한달살이를 시작했다.


2. 17시간을 날아온 그녀, '할아버지'와 '오빠' 사이

열악한 환경이지만 이번 한달살이는 조금 특별하다. 지금까지 여행지에서 몇 번 만났던 조지아 딸내미 안나가 카이로에 와서 2주간 함께 지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경험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내가 여행작가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2주간 안나와의 동행은 지금까지 못 해본 아주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이 경험은 나를 설레게도 하지만, 여행작가로서 이색적인 글감이 될 수 있어 사뭇 기대가 되었다.

KakaoTalk_20260109_172646708_04.jpg 노신사와 매력적인 아가씨의 함께 살이 시험 중

한국 나이 70인 늙은 여행자와 26세의 풋풋한 조지아 아가씨가 2주간 한집에 살면서 함께 여행하는 스토리라니,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나는 1주일 먼저 도착하여 가고 싶은 곳은 나중에 안나가 오면 함께 가기로 미루고, 매일 카페에 앉아 글을 쓰며 안나를 기다렸다. 안나를 위해서 냉장고도 꽉꽉 채워두었다.


안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17시간을 날아왔다. 공항에서 나를 보자마자 "할아버지!" 하며 뛰어오는 그녀는 2년 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아름다워져 있었다. 하지만 내게 안나는 여전히 챙겨줘야 할 손녀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노력 중이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안했다.

"안나, 이제 데오데슈카(할아버지) 말고 한국말로 '오빠'라고 불러봐."

단어의 뜻도 모른 채 "오빠, 오빠" 하고 따르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호칭이 바뀌니 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3. 아슬아슬한 줄타기, "나는 돌부처다"

안나는 혼자 여행하면서 여럿이 함께 쓰는 호스텔에 머물렀는데, 내 숙소는 30평 정도 되는 아파트에 아주 깔끔하고 넓은 방이다 보니 뛸 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우리의 '위태로운 동거'가 시작되었다.


첫날 저녁, 안나는 동네 마트에 나갔다가 짓궂은 이집트 남자들의 시선과 집적거림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안나는 나의 '껌딱지'가 되었다. 24시간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귀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내게 묘한 고통(?)이 되기 시작했다. 안나는 입으로는 "오빠, 오빠" 부르면서도, 행동은 철저히 나를 '보호자 할아버지'로 대하며 온갖 것을 의지하려 했다. 나는 졸지에 서울에 있는 두 살짜리 외손녀를 돌보듯, 이 성숙한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나의 '내면'이었다. 안나는 나를 할아버지로 믿기에 내 앞에서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털며 거실을 활보하거나,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내 옆구리에 바짝 붙어서 스마트폰 화면을 들이민다. 그럴 때마다 훅 끼쳐오는 샴푸 향기와 닿을 듯 말 듯 한 그녀의 온기...


그녀에게 나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할아버지'겠지만, 나에게 그녀는 시시각각 변하는 '살아있는 불꽃'이다. 나는 부처가 아니다. 24시간을 한 공간에서 붙어 지내다 보니, 할아버지의 이성(理性)과 남자의 본능 사이에서 매 순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KakaoTalk_20260109_1754074881.jpg 나를 시험하는 아파트 거실 속의 안나.

잠시 만나 차를 마실 때야 인자한 미소를 지을 수 있지만, 폐쇄된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무방비한 그녀를 지켜보는 건 나 같은 늙은 여행자에겐 달콤하면서도 가혹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오빠, 이거 봐봐!" 안나가 해맑게 웃으며 내 팔을 잡아끌 때마다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이 아이는 손녀다. 나는 돌부처다... 나는 돌부처다...'


나는 내가 실수할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나 혼자만 끙끙 앓아야 하는 이 불공평한 동거가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 것이다. 결국 나는 생존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 내 평정심이 바닥나기 전에 거리를 둬야 했다.


"안나, 나도 글을 써야 하니까 우리 규칙을 정하자... 오전과 저녁은 각자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만 함께 여행하는 걸로."


나는 그녀가 오기 전처럼, 아침저녁에는 카페에서 오롯이 글을 쓰고 오후에만 '가이드' 역할을 하려 했다. 합리적인 제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안나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무서운 이집트에서 여자 혼자 어디를 가요... 할아버지만 믿고 왔는데, 저는 어떡해요..."

아, 진퇴양난이다. 떼어내려니 야박한 남자가 되고, 같이 있자니 내 자유가 질식할 것 같다. 17시간을 날아온 이 사랑스러운 '족쇄'를 어찌해야 할까. 카이로의 뿌연 먼지보다 내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4. 작전 실패, 피라미드 앞에서 무너진 '거리두기'

타협안으로 "오늘 하루는 종일 함께 있고, 내일부터는 각자 시간을 갖자"라고 선언한 뒤, 약속했던 피라미드 관광에 나섰다. 피라미드로 가는 택시 안, 공기는 무거웠다. 안나는 내 말이 서운했는지 아무 말 없이 시무룩하게 창밖만 응시했다. 기분을 좀 풀어줄까 싶어 입이 간질거렸지만, 섣불리 다정하게 대했다가 또다시 '24시간 수발'의 굴레를 쓰게 될까 두려워 나 역시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차 안에는 팽팽한 냉전의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나의 이 견고한 '거리두기 작전'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차 문을 열자마자 하이에나 같은 호객꾼들이 떼로 밀려들었다. 험상궂은 낙타 몰이꾼과 마차꾼들이 고함을 지르며 길을 막아서자, 겁에 질린 안나가 반사적으로 내 팔을 꽉 움켜잡았다.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 '거리두기'라는 이성은 사라지고 오래된 보호 본능이 튀어나왔다. 나는 안나의 보호자임을 알리기 위해 안나 허리를 감싸고 호객꾼들을 물리치며 길을 터주었다. 걷기 불편한 신발을 신은 안나가 비틀거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주다 보니, 거리를 두기는커녕 마치 피란길의 부녀지간, 아니 다정한 연인처럼 더 딱 붙어 다니는 꼴이 되어 버렸다.


'허허, 이것을 어이할꼬...'


피라미드의 웅장함보다 호객꾼과의 전쟁이 더 기억에 남는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안나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오빠, 이제 어디 가요?"

KakaoTalk_20260109_172646708_022.jpg 이집트 치한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정한 포즈로 보호자임을 보여줘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이제 각자 쉬자"라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아침에 뚝뚝 흘리던 그 닭똥 같은 눈물이, 그리고 방금 전 호객꾼들 사이에서 파들파들 떨던 그 작은 손이 떠올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백기를 들었다.


"이집트의 마지막 왕자가 살았던 곳이 있어. 알 만얄(Al Manial) 궁전이라고... 거기로 가자."

결국 나는 또다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나의 '독립 선언'은 카이로의 모래바람과 함께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5. 알 만얄 궁전, 다시 파랑새가 된 그녀

이집트 마지막 왕조의 숨결이 남아있는 알 만얄 궁전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정원은 아기자기했고, 옛 황태자의 저택을 장식한 이슬람식 타일은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쳤다. 아름다운 곳은 사람을 모으는 법인지, 궁전 곳곳은 웨딩 촬영을 나온 예비 신랑 신부들로 붐볐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을 바라보는 안나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궁전의 아름다움에 함께 감탄하고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아침에 그토록 단단히 먹었던 '냉정함'이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뾰로통하던 얼굴이 풀리고 활짝 웃는 안나가 다시 파랑새처럼 귀여워 보인다. '허허, 이놈의 마음이 이리도 간사한 것인가.'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거리두기'를 되뇌었다.

KakaoTalk_20260109_172646708_011.jpg 궁전 응접실

6. 달콤한 탈출, 역시 여행은 혼자가 제맛!

늦은 점심을 먹어 저녁 생각이 없다는 핑계로 일찍 귀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30평 아파트라 해도 둘만 남겨진 공간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샤워를 마친 안나가 가벼운 차림으로 거실을 오가자, 밀폐된 공간의 공기가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낮에 간신히 눌러놓았던 갈등이 또다시 고개를 든다. 결국 나는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손자병법의 '삼십육계 줄행랑'을 택했다.


"나 글 좀 써야 해서 카페 다녀올게." 도망치듯 노트북을 짊어지고 밤거리로 나왔다. 카페의 소음 속에 파묻히고 나서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언제나처럼 숙소 앞 카페. 8인용 커다란 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며 내 집에 온듯하다.


옆자리에는 카이로의 지성인들이 모여 있었다. 영국 유학파 이집트 여성과 인도에서 온 대학원생들. 그들의 영어 수다 속에 나도 모르게 "익스큐즈 미" 하며 끼어들었다. 안나와 있을 때는 '잔소리꾼 할아버지'였던 내가, 이곳에서는 순식간에 '세상 이야기 통하는 쿨한 여행자'로 변신했다.

1.jpg 카페에서 만난 노트북 친구들

"What? 69? No way! You look like 40s!" (뭐라고요? 69세? 말도 안 돼! 40대인 줄 알았어요!)

나이를 밝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셀카를 찍자는 그들. 안나와의 냉전으로 쭈글쭈글해졌던 내 자존감이 팽팽하게 펴지는 순간이다. 아, 그래. 이게 여행이지.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보호자가 아니라, 언제든 새로운 친구를 만날 준비가 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는 것을.


카페의 소음이 교향곡처럼 들린다. 역시, 여행은 혼자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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