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해외여행 뒤에 마주한, 인천에서의 한달살이

by 야간비행

1. 길 위에서 돌아온 여행자의 ‘기항지’

이제 해외여행 4년 차에 접어들었다. 돌아보니 2025년 한 해는 지구를 통째로 삶의 터전 삼아 보낸 시간이었다. 연초 라오스 비엔티안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프놈펜,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한 달씩 머물렀고, 잠시 귀국해 몸을 살핀 뒤 다시 이스탄불과 부다페스트, 비엔나로 이어지는 여정을 소화했다. 차마고도의 험준한 길을 넘고 몽골 울란바토르와 조지아 트빌리시를 거쳐, 10월과 11월엔 남미 대륙의 끝까지 다녀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달력은 어느덧 마지막 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다른 3개월의 여정을 위해 이집트로 떠나기 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딱 한 달이다. 이번엔 이름도 생소한 외국 도시가 아닌, 대한민국 인천에서의 ‘한달살이’가 시작되었다. 사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서울 시민이었으나, 10월에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검암역 앞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뻔질나게 해외를 오가는 내 삶의 궤적에서 집이 굳이 서울 한복판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오로지 세계로 향하는 관문인 공항철도 역세권만을 살폈고, 그렇게 낙점된 곳이 검암이었다. 이사 계약을 할 때야 이곳이 인천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을 정도로 내게 지역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오직 ‘세계로 향하는 통로’가 얼마나 가까운지가 집을 고르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여행자에게 집은 설레는 ‘출발지’이거나 안도감이 드는 ‘도착지’다. 하지만 이번 12월, 나에게 집은 잠시 닻을 내리고 다음 항해를 준비하는 ‘기항지’가 되었다. 창밖으로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짐을 풀고, 해외의 낯선 식탁 대신 익숙한 한국의 맛을 즐기며 보낸 한 달. 그것은 1년 내내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 노출되었던 내 감각을 다시 현실의 땅으로 연착륙시키는 소중한 재활의 시간이기도 했다.


2. 현실로의 복귀: 고지서와 먼지 사이에서

귀국과 동시에 평화는 끝난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순간부터 잊고 지냈던 한국의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를 맞는 것은 배가 터질 듯 우편물을 머금은 우편함이다. 몇 달간 내 부재를 묵묵히 지켜봤을 이웃들의 눈총이 느껴지는 듯해 마음이 무거워진다. 집 문 앞에는 가스 점검, 등기 우편, 소독 안내문들이 훈장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다.


기억을 더듬어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도통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한참을 헤매다 스마트폰을 뒤져 비번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문이 열렸다. 지난번 귀국 때는 도어록 배터리가 방전되어 복도에서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간신히 들어선 집 안에서 마주한 우편물들은 가관이다. 가스 차단 예고부터 세금 연체로 인한 차량 압류 협박까지, 섬뜩한 단어들이 가득하다. 밀린 공과금을 두둑한 연체료와 함께 치러내고 나서야 비로소 내 집의 권리를 되찾은 기분이 든다.


몇 달간 쌓인 집안의 먼지를 닦아내고 이불을 털고 나면, 집은 비로소 안식처의 얼굴을 한다. 하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잠시, 해외에서는 생각할 필요 없던 ‘밀린 숙제’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부모님 산소 방문, 손녀에게 잊히지 않기 위한 ‘눈도장’, 연말 모임, 그리고 여행 중 삐걱거린 몸 상태를 확인하는 병원 검진까지. 해외에서는 오로지 여행기만 쓰면 되었건만, 한국의 한 달은 그야말로 태산 같은 일거리들의 연속이다.


3. 세대와 전통 사이, 고향 산소의 묵직한 숙제

집안 정리를 대충 마치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고향이었다. 아버님의 산소와 어머님이 계신 납골당을 찾았다. 동생이 정성껏 돌보고 있어 겉모양은 깔끔했지만, 묘역을 마주하는 마음은 한결같이 무거웠다. 우리 세대에게 부모님의 묘소를 관리하는 일은 늘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숙제와도 같기 때문이다.


산소 주위에는 멧돼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촘촘하게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 날카로운 철선들을 바라보며 서글픈 질문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과연 내가 떠난 뒤에도 내 자식들이 이곳까지 찾아와 할아버지의 묘소를 지켜낼 수 있을까?’ 산소의 위치라도 기억해 준다면 다행일지도 모르는 시대. 산소를 정리하고 납골당에 모실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고향 어른들의 만류에 가로막힌다. 안데스의 험한 산길을 넘는 것보다, 고향 선산의 이 작은 능선을 지켜내는 일이 내게는 훨씬 더 버겁게 느껴졌다.

KakaoTalk_20260102_235104460_04.jpg 아무도 살지 않아 쇠락해 가는 선산의 고향집

4. 두 돌 손녀의 마음을 훔치는 ‘최고 난도’의 작전

고향에서 짊어지고 온 묵직한 마음을 날려주는 치료제는 역시 손녀다. 하지만 이 존재를 만나는 일은 남미의 국경을 넘는 것보다 더 긴장된다. 서너 달에 한 번 나타나는 외할아버지를 두 돌배기 손녀가 온전히 기억할 리 없다. 딸은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비법으로 “표정과 동작을 크게 할 것”을 주문했다.


나는 손녀 앞에서는 근엄한 지공거사에서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기로 했다. 손녀를 마주하자마자 하이톤의 목소리로 아구구! 이뻐라~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이 할아버지가 대체 왜 이러시나’ 하는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몸을 내어준다. 그래도 그 작은 온기가 품에 닿는 순간, 오늘 이 아이의 기억 한편에 ‘조금 시끄럽지만 다정한 할아버지’로 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5. 남미 여행기 쓰기 : 창작의 고통

인천에서의 한 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숙제는 여행기 집필이었다. 매일 이동해야 하는 배낭여행 중에는 글을 쓰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여행지에서 남긴 메모와 사진을 부여잡고 기억을 복원하는 고통스러운 창작의 시간이 귀국 후에 시작된 것이다.


집 근처 스터디 카페에서 젊은 학생들 틈에 섞여 노트북을 켰다. 들뜬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고, 손가락은 자꾸 딴짓을 했다. 글 한 꼭지를 완성하는 데 열흘이 걸리기도 했다. ‘느긋하게 노후를 즐기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사나’ 하는 실존적 고민이 덮쳐왔다. 유유자적한 삶과 매진하는 삶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무언가에 몰두할 때 평온을 찾는 성정이라는 점이다. 2주쯤 지나 가속이 붙었고, 카이로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남미 여행기 6 꼭지를 기어이 완성해 냈다.


6. 미식의 애국심, 한국 음식이라는 축복

남미 여행 중 몇 차례 한식을 접하긴 했지만, 이번 여정처럼 갈증이 절실했던 적이 없었다. 지난봄 유럽에서 세 달을 지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두 달간의 남미 배낭여행은 육체적 고단함이 컸던 탓인지 뼛속 깊이 ‘매운맛’과 ‘국물’을 갈구하게 했다. 오죽하면 룸메이트와 밤마다 “귀국하면 뭐가 제일 먹고 싶냐”는 유치한 질문을 던지며 상상만으로 침을 삼켰을까.


귀국하자마자 달려간 곳은 대단한 맛집이 아니었다. 집 앞 식당의 김치찌개, 동태탕, 순댓국, 콩나물 국밥 같은 평범한 일상의 식탁이었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감탄이 터졌다. 도대체 한국 음식은 왜 이렇게 맛있는 것일까. 메인 요리는 물론이고 공짜로 깔리는 서너 가지 반찬, 무료로 제공되는 물과 넉넉한 인심은 그 자체로 거대한 축복이자 진수성찬이었다.


하루에 두 끼밖에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매 끼니에 몰두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더니 홀쭉해졌던 살이 금세 차올랐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지척에 두고, 나는 왜 세상을 떠돌고,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고생을 자처할까. 이 큰 행복을 포기할 만큼 방랑의 자유가 가치 있는 것일까?’ 잠시 갈등했지만 답은 명백하다. 한국에서의 미식은 다음 여정에서 마주할 고난을 견디게 할 ‘에너지 충전’이었다. 잘 먹고 잘 쉬어 통통하게 오른 살집은 다시 광야로 나갈 여행자의 든든한 맷집이 된다.


7. 여행 카페 회원들과 어머니 품 같은 한국 산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짬을 내어 여행 카페에서 진행하는 국내 버스 투어에 세 번이나 참여했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내 혈육이 보고 싶듯 한국의 산야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서해안 쪽으로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했다. 해외의 장엄하고 우악스러운 비현실적 풍광에 감탄하곤 하지만, 한국의 아기자기하고 몽글몽글한 산야는 나를 깊은 안도로 이끈다.


서산 한우농장의 야트막한 초지를 거닐며 나는 며칠 전 보았던 아르헨티나의 끝없는 초원 '팜파스'를 떠올렸다. 규모로 치자면 비교조차 되지 않겠지만, 그 정겨움과 포근한 아름다움은 서산 농장의 압승이었다. 또한,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절경들이 지자체의 노력으로 데크 길과 함께 열려 있는 것을 보며, 우리 땅의 새로운 아름다움에 연신 새삼스러운 감탄을 쏟아냈다.

KakaoTalk_20260103_163827431.jpg 서산 한우농장: 몽글몽글한 야산의 모습이 지난달 보았던 아르헨티나 광활한 초원 팜파스보다 더 정겹고 아름답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도 각별했다. 과거 여행길에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 얼굴을 익혔던 회원들을 다시 만났는데, 수십 년 인연을 맺어온 대학 동기들보다 오히려 더 반가웠다. '여행'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가진 이들이기에 가능한 교감일 것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나의 인간관계가 여행을 통해 만난 인연들로 재편되고 있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짧은 국내 여행이었지만, 그 즐거움은 어떤 거창한 해외 여정에도 뒤지지 않는 꽉 찬 행복이었다.


8. 친구들의 안부, 그리고 내가 다시 걷는 이유

연말 모임에서 나누는 근황은 어느덧 ‘생존 신고’에 가까웠다. 누구는 치매로 입원하고, 누구는 암 투병 중이며, 누구는 부고로 돌아왔다. 일흔이면 동창 중 20%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통계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지구 반대편을 누비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건강한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마주 앉은 동기들의 얼굴에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을 거울삼아 나를 돌아본다. 배낭을 메고 세계를 방랑할 수 있는 나의 현재가 얼마나 경이로운 행운인지 실감했다. “나는 죽기 전에 세상을 모두 봐야겠다.” 친구들에게 던진 이 한마디는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남은 생을 향한 다짐이었다.


9. 인천 한달살이를 마치고 다시 여행자로

운 좋게도 나는 아직 건강하다. 귀국 후 병원을 돌며 정밀 점검을 마쳤다. 치아 통증도, 매년 고생하던 비염도 이번엔 별문제 없었다. 이비인후과 의사로부터 “깨끗하다”는 인사를 받았을 땐 여행 합격 통지서라도 받은 듯 홀가분했다. 3개월의 여정을 지켜줄 비상약 한 보따리를 챙겨 들고 다시 광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


12월 30일, 인천에서의 한달살이를 마치고 다시 배낭을 멨다. 차 배터리를 충전하고 우편함을 비우고 고지서를 정리했다. 집은 다시 고요 속에 잠기겠지만 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공항철도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지는 2025년의 마지막 노을이 서해 바다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열차의 덜컹거림이 리듬감 있는 자장가로 들려올 때쯤, 나는 이미 나일강의 푸른 물결 위를 걷고 있었다. 3년간 길 위에서 1,000일 가까이 보냈지만, 다시 떠나는 이의 심장은 여전히 첫 여행처럼 뜨겁게 고동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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