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일간의 남미 배낭여행 7: 에필로그

경이로운 대륙에 마침표를 찍다.

by 야간비행

남미 55일 여정 중, 주인공들의 그늘에 가려 자칫 놓칠 뻔했던 두 나라가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화려함에 취해 있을 때 배를 타고 건너간 우루과이, 그리고 이구아수의 굉음에 이끌려 잠시 국경을 넘었던 파라과이가 그곳이다.


1. 우루과이: 남미의 모범국가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위치하여 두 나라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배에 올랐다. 두 시간 남짓 물길을 가르는 동안 창밖은 온통 황토색이었다. 강이라 하기엔 너무나 광활하고, 바다라 하기엔 물빛이 생경한 묘한 물길을 지나 우루과이의 역사 도시, 콜로니아(Colonia)에 닿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선 콜로니아의 풍경은 강 너머 아르헨티나와는 확연히 다른 결을 품고 있었다. 길을 따라 빽빽하게 들어선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도시 전체를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대로 뒷골목의 집들은 저마다 앙증맞은 정원을 가꾸어 예쁜 꽃들을 만개시키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흐르는 정감 어린 평화로움. 남미에서 소득이 가장 높고 안전한 나라라는 우루과이의 명성이 이 작은 소도시의 골목마다 증명되고 있는 듯했다.

KakaoTalk_20260101_180742942_04.jpg 콜로니아의 모든 도로는 이처럼 울창한 가로수가 들어차있다.

이곳은 18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이 각축을 벌이던 시절의 요새와 구시가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돌바닥 길을 걷다 보면 마치 한국의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을 거닐 때처럼 아련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두 거인 사이에서 스스로 '완충국'이 되기를 선택하며 지켜온 이 평화는, 낡았지만 반질반질하게 닦인 성벽의 돌들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10k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해안선을 따라 잘 조성된 공원과 산책로에는 시민들이 한가로이 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해변의 물색이 못내 아쉬움을 남겼다. 이구아수 폭포를 지나온 거대한 강물은 중국의 황하처럼 황토를 머금은 채 바다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 물빛만 맑았더라면 이곳은 분명 세상에 둘도 없는 천혜의 휴양지가 되었을 터였다.

KakaoTalk_20260101_183238445_02.jpg 해변은 아름답지만 물이 황톳빛이어서 아쉽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물빛 대신 대지의 풍요를 얻었다. 광활한 초원에서 자란 소들은 이 나라의 가장 큰 자산이다. 여행의 저녁, 우리는 스테이크 전문점을 찾아 세계 최고의 맛이라는 우루과이산 고기를 마음껏 즐겼다. 식당은 최고의 스테이크를 찾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입안 가득 퍼지는 풍미는 파타고니아의 거친 바람을 맞고 자란 소들보다 더 진하고 깊었다. 짧은 이틀간의 방문이었지만, 한 나라를 온전히 이해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2. 파라과이: 자연을 길들인 인간의 거대한 벽

파라과이는 처절한 전쟁 끝에 많은 국토를 잃고서야 지금의 국경선을 갖게 된 아픈 역사를 품은 나라다. 하지만 오늘날 그 국경의 풍경은 의외로 담백하고 자유로웠다. 브라질 쪽 이구아수 시 외곽의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파라과이다. 브라질 택시는 마치 유럽의 EU 국가를 오가듯 아무런 제약 없이 국경 다리를 넘나들었다.


우리는 파라과이의 자부심이라 불리는 '이타이푸(Itaipu) 댐'으로 향했다. 다리 위 정체는 극심했지만, 차창 밖 풍경은 서울의 강남과 강북처럼 하나의 생태계로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다. 세계 최고의 전력 생산량을 자랑하는 이 거대한 댐의 전시관에서 나는 뜻밖의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한국 수자력공사(K-water)'와의 협력 내용이었다. 지구 반대편의 거대한 물줄기를 다스리는 현장에서 우리 기술의 발자취를 발견하는 순간, 대한민국이 얼마나 촘촘하게 세계의 혈맥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절감하며 가슴이 뿌듯해졌다.

KakaoTalk_20260101_180742942.jpg 발전용량 세게 최고라는 거대한 이타이푸 댐.

3. 남미 곳곳에서 마주한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

이번 여행 중 나를 가장 벅차게 했던 것은 자연 풍광만이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 남미의 심장부 곳곳에서 발견한 선명한 한국의 흔적들은 여행 내내 내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리마 공항의 수많은 모니터에는 삼성 로고가 빛났고, 엘 칼라파테 공항은 LG의 로고로 가득했다. 대륙을 누비는 현대와 기아자동차는 세상의 명품차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KakaoTalk_20260101_183238445_04.jpg 우루구아이 콜로니아에서 만난 현대차 정비센터.

문화의 힘은 더 놀라웠다. 마추픽추 아래에는 현지인이 운영하는 '한강 라면' 식당이, 우유니 사막 입구에는 한국 음식점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었다. 카페에서는 K-POP이 흘러나오고, 라파스 골목 구멍가게 주인은 한국 오락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웃고 있었다. 노란 풍선, 작은 별 등 한국 여행사 로고가 적힌 최고급 차량들은 한국 관광객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머나먼 남미가 이토록 한국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60년 전 교과서로만 남미를 배웠던 늙은 여행자의 가슴에 뜨거운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4. 여정을 빛나게 한 '사람'이라는 풍경

8명이 함께한 이번 여행은 나를 포함한 6명이 홀로 참여한 이들이었다. 배낭여행의 특성상 55일간 누군가와 방을 나누고, 4명씩 짝을 지어 택시로 이동해야 했다. 사실 단체 여행에서 마음이 맞지 않는 동행을 만나는 것은 풍경을 망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저마다 다른 타인들이 모여 매 순간 '최대공약수'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60101_175636069.jpg 8명이 호흡을 맞춘 따뜻했던 남미배냥여행

이번 동반자들은 놀랍게도 자기보다는 공동을 먼저 생각하는 성품 좋은 사람들이었다. 국내에서 짧은 여행을 다닐 때조차 사소한 오해로 다투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이들을 심심찮게 보아왔기에, 이 긴 여정을 서로 돕고 배려하며 마무리한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때로는 자기 이익을 양보할 줄 아는 성숙한 동행들이 있었기에 3만 보의 강행군도 웃으며 버틸 수 있었다. 결국 여행의 즐거움을 완성하는 것은 압도적인 풍광이 아니라,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과 배려라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한 시간이었다.


5. 여행의 끝판왕, 남미를 보내며

55일간 남미 7개국을 가로지른 긴 여정을 마쳤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라는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후보들이 너무나 쟁쟁하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마추픽추의 신비부터 우유니의 소금평원, 파타고니아의 거친 숨결과 이구아수의 굉음까지. 남미는 내 경험의 한계를 비웃듯 압도적인 풍광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왜 남미가 여행의 '끝판왕'인지, 나는 그 광활한 대지를 매일 3만 보씩 걷고 나서야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KakaoTalk_20251226_191708023.jpg 파타고니아 델파이네 3봉의 비현실적인 일출 모습

이제 그 '비현실'의 충격을 뒤로하고 나는 '생활'로서의 남미를 다시 꿈꾼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보낼 한 달 살이의 미래를 그려본다. 멀게만 느껴졌던 남미는 이제 정서적으로 한 뼘 더 가까워졌다. 미처 가보지 못한 중미의 신비로움은 다음 기회를 위해 남겨두려 한다. 남미의 태양에 그을린 내 얼굴과 마음속에 새겨진 경이로운 지도가, 나의 다음 여정을 벌써부터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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