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한달살이
1. 아쉬운 작별, 그리고 주마등
안나가 떠났다. 공항 출국장 앞에서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는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며 "곧 다시 만나자"고 위로해 보냈다.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안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지난 2주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말 일 것이다.
2. 낮의 안나: 엔돌핀이 솟는 '나의 뮤즈'
안나와의 여행은 내 인생에 다시없을 엔돌핀이 치솟는 희열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정말 귀여운 막내딸 같았다. "오빠, 오빠" 하며 애교를 부리고, 기분이 좋으면 깡충깡충 뛰고 춤을 췄다. 피라미드, 룩소르 신전, 알렉산드리아... 그 장엄한 고대 유적지 앞에서 안나의 생기 넘치는 재롱을 보는 것은, 유적 감상 이상의 기쁨이자 내게 젊음의 에너지를 수혈해 주는 시간이었다.
안나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과 영상에 목숨을 걸었다. 물론 촬영 담당은 나였다. 안나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전문 모델로 변신했다. 온갖 요염하고 귀여운 포즈를 취하며 때로는 개구쟁이처럼, 때로는 공주처럼 나를 즐겁게 했다. 내가 찍어준 사진을 보며 행복해하고, 댓글 반응을 보며 "오빠 사진 정말 잘 찍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그녀를 보면 나도 덩달아 흐뭇해지곤 했다.
카르낙 신전 매표소에서 만난 한국인 중년 여행자가 우리를 보고 놀라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금발의 20대 미녀가 70대 동양인 노인의 팔짱을 끼고 "오빠"라 부르며 다니는 모습. 남들 눈에는 기괴해 보였을지 몰라도, 그 순간 나는 세상 누구보다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 여행자였다.
3. 아침의 안나: 옷에 똥 싼 표정의 '하이드'
하지만 낮의 희열은 딱 해가 지기 전까지였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사랑스러웠던 안나는 서서히 '예민한 상전'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상황은 점입가경, 아니 '공포 영화'로 바뀐다.
아침에 일어난 안나의 얼굴은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나 싶을 정도로 찌푸려져 있다. 내 표현을 빌리자면 딱 '옷에 똥 싼 표정'이다. 안나가 온 다음 날, 아침밥을 먹으라고 깨웠다가 봉변을 당했다. "내가 알아서 일어날 거니까 깨우지 마! 내가 지금 얼마나 피곤한데 소리를 질러!" 안나는 마치 맹수처럼 꽥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제 그 애교 많던 '오빠 바라기'는 어디 가고, 웬 히스테릭한 마녀가 앉아 있나 싶었다.
내가 정성껏 차려놓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인상을 잔뜩 쓴 채 반찬 투정을 한다. 마치 내가 요리를 망친 식당 주방장이라도 된 듯 나를 몰아세운다.
며칠 지내보니 패턴이 보였다. 낮에는 여행의 흥분에 취해 '지킬 박사(천사)'가 되었다가, 밤이 되고 약발이 떨어지면 '하이드(괴물)'로 변하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딴사람이 되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처음 이틀은 17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온 피로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 앙탈마저 귀엽게 봐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3일째가 되자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건 단순히 피곤해서가 아니라 버릇의 문제였다.
4. 결심: 야생마 길들이기 프로젝트
먹여주고, 재워주고, 최고의 여행 가이드까지 해주는 나에게 아침마다 짜증을 부리다니. 이 터무니없는 행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조지아에서 온 이 천방지축 야생마를 길들이기로 했다.
5. 1차 충격 요법: "너 혼자 다녀라"
나중에 AI에게 물어보니, 안나의 증상은 기상 직후 뇌가 각성하지 못해 극도의 짜증을 느끼는 '심한 수면 관성'이나, 아침에 기분이 바닥을 치는 '조조(早朝) 우울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녀의 뇌는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70세의 부지런한 노인이 옆에서 '해 떴다, 밥 먹어라' 닦달을 했으니, 그녀 입장에선 내가 알람 시계보다 더 끔찍한 소음 공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병적인 증상이라 해도, 나의 소중한 아침을 매번 망치는 그 똥 씹은 표정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언제까지고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툴툴거리며 돌아다니는 안나에게 통보했다. "안나, 나는 나에게 짜증 내는 사람과는 여행할 수 없다. 오늘부터 여행은 각자 하자. 잠은 재워줄 테니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좋다. 하지만 밖에서는 너 혼자 다녀라.“
내 말을 들은 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할아버지만 믿고 여기 왔는데... 나는 이제 어떡해요?" 울면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뒷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이번에 아침 히스테리를 잡지 않으면 내 남은 여행이 지옥이 될 게 뻔했다.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혼자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노트북을 둘러매고 카페로 나가버렸다.
사실 이것은 계산된 충격 요법이었다. 안나는 카이로에 오면서 가고 싶은 곳을 메모지 한 장에 빼곡히 적어왔다. 이집트는 치안이나 물가 면에서 젊은 여성이 혼자 다니기 만만치 않은 곳이다. 할아버지라는 '물주'이자 '가이드'가 사라진다면 그녀가 겪을 멘붕은 불 보듯 뻔했다.
몇 시간 후, 안나가 카페로 찾아왔다. 우버 앱이 안 된다는 핑계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단호했다. "오늘은 혼자 다녀. 내일부터 같이 다닐지는 저녁에 생각해 보겠다." 나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 보냈다. 그 후 안나는 시시각각 자기 위치를 알리며 '보고'를 해왔지만, 나는 저녁에 보자는 쌀쌀한 답장만 남겼다.
효과는 확실했다. 저녁에 만난 안나는 평소와 달리 집에서도 순한 양처럼 애교를 부렸다. 며칠간은 꽤 조신하게 행동했고, 나도 다시 그녀를 예뻐해 주며 평화를 되찾는 듯했다.
6. 2차 폭발: 공항에서의 "꺼져!"
하지만 안나의 아침 히스테리는 쉽게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AI의 조언대로 아침에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며 참았지만, 결국 룩소르로 떠나는 날 새벽,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새벽 6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3시에 안나를 깨웠다. 비몽사몽 툴툴거리는 녀석을 어르고 달래 겨우 공항에 도착했는데, 하필 비행기가 1시간 연착이란다. 그 순간, 안나의 짜증이 폭발했다. "새벽부터 사람을 못 살게 깨우더니, 결국 공항에서 할 일 없이 기다리게 생겼잖아!“
안나는 마치 모든 게 내 탓인 양 악을 썼다. 나는 티켓팅하고 게이트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계속 투덜거리는 꼴을 보니 더 이상 이성의 끈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참았던 화산이 폭발했다.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려거든 당장 꺼져! 나 혼자 갈 테니까 너는 집에 가!"
공항 로비가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볼 정도였다. 나의 격노한 모습에 안나는 파랗게 질려 얼어붙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혼자 게이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7. 길들여진 야생마, 그리고 평화
탑승 시간이 다 되어서야 안나가 쭈뼛거리며 내 앞에 나타났다. 잔뜩 주눅 든 모습이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안아주었다. "안나, 화내지 마. 네가 화내면 나도 화가 나고 슬퍼." 등을 토닥여주자 안나는 눈시울이 빨개지며 내 어깨에 기댄다.
그날 이후, 안나의 짜증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도 그녀가 아침에 약한 '올빼미형 인간'임을 이해하고 배려하게 되었고, 안나 역시 내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 할아버지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서로의 '선'을 확인한 뒤 우리의 여행은 안정을 되찾았다. 길들여진 야생마의 재롱은 더 늘어났고, 나의 여행도 비로소 완전한 기쁨이 되었다.
8. 야생마에서 여행의 동반자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토록 콧대 높던 야생마도 순한 양이 되었다. 안나는 벌써 헤어지는 게 아쉽다며 울상이다. 심지어 내 다음 여정인 튀니스까지 따라오고 싶어 했다. "네가 원하면 같이 가자." 내 제안에 안나가 신나서 이것저것 알아보았지만, 야속하게도 비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못내 아쉬워하는 그녀에게 나는 다음을 기약해 주었다. "4월부터 발칸 반도 여행을 시작할 거야. 그때 다시 합류해라.“
온갖 지지고 볶는 과정을 거치며, 이제 나와 안나는 서로를 견디는 단계를 넘어 서로가 필요한 '완전한 여행 동반자'가 되었다.
9.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오늘 아침 일찍, 안나를 공항에 데려다주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안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건강히 지내라. 곧 다시 보자.“
안나는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안나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 안. 차창 밖으로 카이로의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안나라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나만의 고요하고 자유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혼자 남은 택시 안,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다. 나의, 그리고 안나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추가글...
조지아 트빌리시로 향하는 안나가 환승을 위해 이스탄불 공항에 내려서 나에게 영상편지를 보냈다. 눈물을 글썽이며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한다. 연인의 이별도 아니면서 내 마음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