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마주친 용감무쌍한 5060 한국 여성들

언어 장벽도 뚫어버린 아줌마들의 위대한 방랑

by 야간비행

1. 세계 곳곳에서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자유여행 중인 한국 여행자를 만난다. 깃발 따라 쫓아다니는 패키지 여행객은 그저 스쳐 지나가지만, 배낭을 메고 지도를 보며 걷는 한두 명의 자유여행객을 만나면 으레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게 된다.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서로 환하게 웃으며 안부를 묻곤 한다.


최근 들어 이 자유여행객의 연령대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실감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모험심 강한 젊은이들의 전유물 같았는데, 작년과 올해는 5060 세대가 훨씬 더 많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여성들'이다. 5060 여성들끼리 온 팀이 절반은 되는 듯하고, 부부나 모녀 여행객, 그리고 나처럼 혼자 다니는 남성 여행객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외국어와 안전 문제로 패키지여행만 선호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5060 한국 여성들은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2. "스페인어? 불어? 영어도 못해요!"

이들의 여행지는 동남아 안전한 휴양지 수준이 아니다. 전 세계 험지(?)를 가리지 않는다.

몇 달 전, 지구 반대편인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빙하 마을 '엘 칼라파테' 마트에서였다. 5060 한국 여성 세 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몇 달째 북미와 남미를 배낭 메고 자유여행 중이라고 했다. "스페인어는 좀 하시나 봐요?"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 "스페인어는커녕 영어도 잘 못해요!" 그녀들은 오늘 저녁에 해 먹을 거라며 빙하 마을 마트에서 씩씩하게 배추와 고기를 고르고 있었다.


지난달 북아프리카 튀니스의 한 식당에서도 60대 한국 여성 두 명을 만났다. 한 여성이 나 홀로 아프리카를 여행 중인데, 친구가 중간에 합류해 같이 다니는 중이란다. 그들은 알베르 카뮈의 고향을 보고 싶어서 알제리로 넘어갈 거라며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고 오는 길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조차도 안전이 우려되어 패스한 알제리를 60대 여성 둘이서 가겠다니, 솔직히 기가 질렸다. "불어는 좀 하세요?" 했더니 이번에도 "아유, 영어도 못해요!" 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내가 가입한 여행 카페나 주변 지인들만 봐도 친구들끼리 자유여행을 떠나는 5060 여성을 쉽게 볼 수 있다. 솔직히 내 영어도 겨우 생존 영어에 불과해 여행 중 애를 먹을 때가 많은데, 그녀들은 내가 들어도 낮 간지러운 '초딩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당당하게 해외를 종횡무진한다. 모두들 배짱 하나만큼은 정말 두둑하다.


3. 렌터카 운전대도 거침없이 잡다

유럽으로 넘어와서도 이 용감한 행진은 계속된다. 지금 내가 머무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트램을 타려고 대기하던 중, 한국인 모녀 자유여행객과 인사를 나누었다. 어제 인천을 출발해 방금 리스본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나왔다는 그들은, 앞으로 한 달간 렌터카로 이베리아 반도를 샅샅이 돌 계획이라고 했다.


30대 딸이 영어를 담당하고 60대 엄마는 그저 따라다니는 줄 알았는데, 운전대를 잡는 쪽은 놀랍게도 60대 엄마란다. 과거 렌터카로 이베리아 반도를 돌아본 적 있는 나는, 유럽 도심 운전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잘 안다. 복잡한 회전교차로, 악명 높은 주차난, 미로 같은 일방통행 길 투성이다. "거기 운전하기 만만치 않은데요?" 하며 걱정스레 묻자, 어머니는 "저 운전 잘해요!"라며 여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무모한 건지 용감한 건지, 하여간 대단한 담력이다.


4. 무엇이 그녀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나

유창한 외국어 없이도, 험난한 운전 코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이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우선 기술의 발전을 꼽을 수 있다. 과거 유창한 외국어로 무장해야만 가능했던 자유여행이,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면 해결되는 시대가 되었다. 구글 지도와 번역 앱, 그리고 최근 여행의 풍경을 바꿔놓은 AI 기술 덕분에 낯선 곳에서 생존하는 일이 무척 쉬워졌다. 여행사가 정해준 빡빡한 일정 대신,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는 자유여행의 매력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치열하게 가정을 일구고 사회생활을 하며 경제력과 지적 능력을 갖춘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를 맞이한 시기적 요인도 크게 한몫했다.


5. 남편 몫의 곰국을 끓여놓고 떠나는 위대한 방랑

하지만 기술과 돈만 있다고 다 낯선 길을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용기'다.


나이가 들수록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활동적이고 밖으로 향하는 에너지가 강하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체감한다. 꼭 해외여행이 아니더라도, 구청 문화센터의 취미반을 가봐도 온통 여성들 차지다. 나이가 들면 여성은 남성 호르몬이 증가해 씩씩해지고 남성은 그 반대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결코 빈말이 아닌 듯하다.


가끔 호기심에 "남편은 어떡하고 혼자(혹은 친구들끼리) 오셨어요?" 하고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다. "아유, 이제는 따로 다녀야죠. 우리 남편은 무서워서 이런 데 못 와요." 그러면서 으레 남편 먹을 곰국을 한 솥 끓여놓고 훌쩍 떠나왔다는 무용담(?)이 이어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우리 세대 남자들은 평생 직장에서 일하느라 너무 바쁘고 지쳤다. 은퇴 후 또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사서 고생하는 길에 들어서기를 달가워할 리 없다. 나처럼 '글을 쓴다'는 뚜렷한 목표가 없다면, 그저 집 근처 산에 올라갔다가 친구들과 막걸리 한잔 하는 즐거움이 낯선 길바닥을 헤매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가깝고 편안한 동남아 휴양지라면 모를까.


패키지여행의 수동적인 편리함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스마트폰 하나 쥔 채 알제리의 사막으로, 파타고니아의 빙하로, 리스본의 좁은 골목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는 한국의 5060 여성들. 언어의 장벽 따위는 특유의 넉살과 환한 미소로 가볍게 뛰어넘는 그녀들의 당당하고 위대한 방랑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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