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한복판에서 탑골공원을 만나다

전 세계 은퇴한 남성들의 만국 공통 시간 보내기

by 야간비행

1. 낭만의 도시? 아니, 늙어가는 도시 리스본

포르투갈 리스본에 오기 전, 내 머릿속의 이 도시는 노란색 트램이 달리는 낭만과 활기의 도시였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짐을 풀고 거리를 걷다 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백발의 노인'들이다. 메트로 안에도, 노천카페에도, 좁은 골목길에도 노인들이 가득하다.


알고 보니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초고령화 국가란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영국이나 프랑스 등 다른 EU 국가로 떠나고, 남겨진 노인들이 낡고 아름다운 이 도시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지방 도시들이 겪고 있는 노령화 현상과 놀랍도록 닮아 있어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2. 리스본 공원에서 벌어진 치열한 카드판, 그리고 자본의 민낯

숙소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가 아주 익숙하고도 재미있는 풍경을 목격했다. 공원 벤치에 노인 네 명이 모여 앉아 진지하게 카드판을 벌이고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주위를 빙 둘러싼 구경꾼들이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 뒷짐을 진 노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미간을 찌푸린 노인까지 하나같이 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훈수를 두느라 여념이 없다. 나 역시 그들 틈에 슬쩍 끼어 한참을 지켜보았다. 판이 끝날 때마다 꼬깃꼬깃한 종이에 결과를 적어 내려가는 것을 보니, 필시 밥값이나 술값을 건 내기인 듯했다.


그 진지한 열기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영락없는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장기판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장기 알이 카드로, 소주병이 맥주캔으로 바뀌었을 뿐, 은퇴한 늙은 사내들이 모여 하루를 보내는 풍경은 서울이나 리스본이나 완벽하게 똑같았다.


시선을 돌려 공원 인근의 근사한 노천카페를 보니, 그곳에는 또 다른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유롭게 커피나 맥주를 즐기고 있다. 주머니가 가벼운 노인들은 공원 벤치에 모여 카드를 치고, 주머니가 두둑한 노인들은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풍경. 이마저도 종로 3가와 판박이다. 탑골공원 안쪽에는 주머니 가벼운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청계천 쪽 번듯한 식당과 커피숍에는 주머니 두둑한 노인들이 자리 잡는 그 현실적인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한국과 포르투갈, 두 나라의 경제 수준과 고령화 수준이 비슷하다 보니 노인들의 하루 일과마저 이렇게 닮아가는 모양이다.

카드.jpg 리스본 동네 공원에서 카드놀이 중인 노인들

3. 타이베이의 마작, 터키의 낚시, 아랍의 커피

이 리스본의 카드판을 보고 있자니, 지난 4년간 전 세계를 방랑하며 목격했던 각국 늙은 사내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2년 전 대만에 갔을 때도 그랬다.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공원 공터에는 어김없이 동네 할아버지들이 모여 마작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곳에도 턱을 괴고 훈수를 두는 구경꾼 할아버지들이 넘쳐났다.

최근 한 달간 여행했던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의 풍경은 조금 다르고도 비슷했다.


그곳의 노인들은 판을 벌이는 대신 낡은 노천카페에 모여 앉아 있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 혹은 달달한 민트 티 한 잔을 시켜놓고 온종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물담배(시샤)를 뻐끔거리는 것이 그들의 일과였다. 같은 이슬람권이긴 하지만,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의 노인들은 조금 달랐다. 도시를 빙 두르고 있는 바닷가 다리 위에 일렬로 서서, 온종일 낚싯대를 드리운 채 세월을 낚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카드를 치든, 마작을 하든, 낚시를 하든, 커피를 마시든 결국 본질은 하나다. 평생을 매여있던 직장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온 남자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동네 공터나 카페로 나와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단지 주머니 사정과 지역 문화에 따라 공터와 카페, 다리 위로 자리가 바뀔 뿐이다.

마작.jpg 타이베이 공원에서 마작을 하고 있는 노인들

4. 아내들은 배낭을 메고, 남편들은 공원으로 간다

앞서 쓴 글에서 나는 스마트폰 하나 쥔 채 알제리의 사막으로, 파타고니아의 빙하로 씩씩하게 떠나는 용감한 5060 한국 여성들에 대해 감탄한 바 있다. 그녀들은 두꺼운 언어의 장벽마저 특유의 넉살로 무너뜨리며 자유여행을 즐긴다.


그 활기찬 아줌마들의 대척점에 바로 이 공원의 할아버지들이 있다. 아내들이 곰국을 한 솥 끓여놓고 전 세계로 위대한 방랑을 떠날 때, 남편들은 집 근처 공원 벤치로, 카페로 출근 도장을 찍는다. 직장과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낯선 곳에 적응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의 씁쓸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세상 어디를 가나 여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에너지가 밖으로 뻗어나가고, 남자들은 한 곳으로 오그라든다는 사실이 이 노인들의 풍경 속에서 다시 한번 증명되는 듯하다.


5. 방랑자의 미소

물론 탑골공원이든 리스본 공원이든, 그곳에 모여 소일거리를 하는 노년의 삶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치열하게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온 그들에게 공원 벤치는 돈 안 들고 마음 편히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해방구일 것이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남성이다. 단지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카드 패를 쥐는 대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구글 지도를 쥔 채 낯선 이국땅을 걷고 있을 뿐이다.


리스본의 따스한 오후 햇살 아래, 카드를 내려놓으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이방인 동년배들을 바라보며 나 역시 조용히 미소를 지어본다. 우리의 노년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흘러가고 있다.

KakaoTalk_20260306_203343220.jpg 리스본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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