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달항아리의 여백을 그리워하다

스쳐 가는 여행과 스며드는 여행이 다르게 보여주는 것들

by 야간비행

1. 3년 만에 다시 마주한 거대한 절벽

리스본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왔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3년 전 친구들과 렌터카로 이베리아반도를 돌 때 이곳에서 이틀 밤을 보냈었다. 당시는 쫓기듯 유명한 관광 명소들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3주간 머물며 시내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고 세계 최고의 관광 도시를 천천히 음미해 볼 생각이다. 처음 이틀간은 비 내리는 바르셀로나의 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며 도시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했고, 3일째 되던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첫날, 시내 중심인 카탈루냐 광장(Plaça de Catalunya)에서 가우디의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로 향했다. 3년 전 자유여행으로 단 이틀을 머물렀을 때, 이 성당은 내게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의 경이로움과 웅장함 그 자체였다. 당시의 충격적인 아름다움이 아직도 가슴속에 생생히 남아있을 정도다. 두 번째 마주하는 성당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지 무척 궁금했다.


구글 지도를 보며 성당을 찾아가는데, 지척에 다다랐음에도 그 높은 첨탑이 보이지 않는다. 7~8층 높이의 건물들이 성당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어서다. 마지막 건물을 지나고 나서야 갑자기 거대한 절벽처럼 성당이 시야에 들이닥쳤다. 다시 마주한 성당의 겉모습은 묘하게도 3년 전과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어딘가 불편했다. 웅장함을 넘어 고압적이었고, 섬세함을 넘어 수선스럽고 사치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가우디 특유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맥락과 조화'에 있었다.


이 거대한 성당은 바르셀로나의 바둑판형 도심 건물들에 완벽히 포위되어 있다. 한 블록만 뒤로 물러서도 숲 같은 건물들에 가려 그 자태를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결국 코앞까지 다가가서 목이 뻐근하도록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쳐다봐야만 한다. 탁 트인 여백 없이 바로 눈앞에 내리 꽂히는 거대한 돌기둥들은 경이로움보다는 쏟아질 듯 짓누르는 거대한 절벽처럼 다가왔다.


가우디가 처음 이 성당을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성당이 건설되는 1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도시 계획이 진행되고 주변 건물들이 야금야금 접근해 오면서 지금처럼 도심 한가운데 꽉 파묻혀 버린 것이다.

KakaoTalk_20260309_051231168_03.jpg 도시에 파묻힌 사그라다 파밀리아. 주변이 차츰 고층빌딩으로 바뀌고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잃어갈 것 같다.

2. 바다에 뜬 모스크, 그리고 산에 안긴 사찰

무릇 건축물의 진정한 가치는 스스로 얼마나 화려하게 빛나느냐가 아니라, 주변 환경과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에 서서 뻐근한 목을 꺾고 있자니, 지난달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마주했던 하산 2세 모스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탁 트인 공간, 대서양의 파도와 수평선을 배경 삼아 서 있던 그 모스크는 마치 바다 위에 유유히 떠 있는 거대한 배처럼 보였다. 주변을 압도하는 대신 거대한 자연을 품어 안은 그 모습은 한없이 웅장하면서도 순수했다.


한국의 산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첩첩산중의 능선을 거스르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나무나 바위처럼 조용히 자연의 일부로 내려앉은 산사의 품격이야말로 진정한 건축의 아름다움이다. 만약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이 꽉 막힌 도심 한복판이 아니라 저 멀리 몬주익 언덕 위에 자리 잡아 지중해를 굽어보고 있었다면, 그 웅장함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성스럽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KakaoTalk_20260309_051231168_02.jpg 바다와 조화를 이룬 하산 모스크. 건물의 아름다움은 주변과의 조화가 중요하다.

3. 요란한 조각보다 기품 있는 달항아리의 미학

성당 외벽을 빈틈없이 가득 메운 복잡하고 수선스러운 장식들도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특히 건물 곳곳에 색색깔로 쓰여 있는 글자들과 문양들이 유독 눈에 거슬렸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인데, 아마도 완공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을 하며 새롭게 채워 넣은 듯했다. 천재 가우디가 애초에 저렇게 요란한 색감을 계획한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 화려함 앞에서 엉뚱하게도 한국의 '달항아리'를 떠올렸다. 화려한 색채와 기교로 시선을 뺏으려 안달 난 일본이나 청나라의 도자기보다, 아무런 장식 없이 둥그스름한 여백을 넉넉하게 품은 달항아리가 내 눈에는 훨씬 기품 있고 아름다워 보인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나오는 법이다. 종교적인 성스러움 역시 다를 바 없다. 무언가를 끝없이 채워 넣은 요란스러운 사그라다 파밀리아보다, 탁 트인 공간에 수수하게 여백을 품고 서 있던 하산 모스크가 내게는 훨씬 더 성스럽게 다가왔다.


4. 여행의 속도가 느려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짧은 일정에 쫓겨 랜드마크 앞에서 서둘러 인증 사진을 찍고 돌아서던 '관광객'일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다.


한 달 살기 하듯 느긋하게 도시에 스며들어 걷고, 생활자의 시선으로 멈춰 서고 나서야 비로소 건축물이 주변과 맺고 있는 '관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려한 외관에 무조건 압도당하는 대신, 그것이 주는 묘한 불편함마저 찬찬히 곱씹어 볼 수 있는 여유. 이것이 바로 스쳐 지나가는 여행과 스며드는 여행이 주는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다.


어쩌면 3년 전 이곳을 다녀간 후, 그동안 세계 여러 곳을 쉼 없이 여행하며 내 눈과 안목이 한층 높아진 탓도 있을 것이다. 지난달 카사블랑카 하산 모스크의 잔잔하고 수수한 모습에 감동했던 기억이 아직 짙게 배어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수선스럽고 화려한 것보다는 슴슴하고 담백한 것이 더 마음을 울리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남은 20일.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 싱겔린(Singuerlín) 역 근처 엔리케타 거리(Carrer de l'Enriqueta)의 내 쉼터로 돌아오는 길. 또 어떤 유명한 풍경들이 낯설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올지, 비 내리는 거리를 걷는 발걸음이 기분 좋게 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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