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00일의 방랑을 지켜준 '분산 배치'의 철칙
퇴직 후 3년여, 1,000일가량을 전 세계 낯선 도시들을 떠돌며 방랑했다. 가방과 폰을 내가 두고 온적은 있어도 누군가에게 도난을 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름의 철저한 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중 내 눈앞에서 소매치기가 벌어지는 현장을 몇 번 목격했었다. 3년 전 친구들과 리스본 시장에 갔을 때, 소매치기 일당이 우리 일행 중 한 여성의 얼굴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당황해하는 틈을 타 가방에서 폰을 꺼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다행히 폰이 튼튼한 줄로 가방에 묶여 있어서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이후 나는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만약 당하더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철저한 '분산 배치' 방법을 쓰고 있다.
새로운 숙소에 도착하면 여권과 큰돈은 매트리스 아래 깊숙이 숨겨둔다. 외출할 때는 어깨 가방을 가슴 앞으로 단단히 메고, 그 안에 폰과 메인 카드, 숙소 키를 넣는다. 그리고 혹시 모를 가방 분실이나 날치기에 대비해, 폰으로 즉시 정지시킬 수 있는 트래블 카드와 약간의 현금을 넣은 예비용 지갑은 바지 뒷주머니에 넣는다. 물론 뒷주머니는 지퍼나 단추로 단단히 잠가둔다. 이 정도면 소매치기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오늘,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의 인적 드문 뒷골목을 걷기 전까지는 말이다.
2. 뒷골목의 불청객과 '주짓수 수법'
낯선 도시의 정취는 화려한 대로보다 후미진 골목에 숨어있기 마련이라, 나는 유유자적 그 외진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불량스러운 인상의 40대 남자가 접근해 왔다. "니하우." 나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곤니찌와", "안녕하세요." 놈이 한중일 언어를 자판기처럼 돌려대며 말을 걸어왔지만 철저히 무시했다. 낯선 이의 접근에 대꾸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건 1,000일의 방랑을 통해서 습득한 철칙이다.
내가 끝까지 대꾸를 않자, 놈은 멋쩍은 듯 "너를 귀찮게 해서 미안했다"며 악수를 청했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그놈의 끈질긴 '아임 쏘리'에 속아 무심코 손을 내민 것이 화근이었다.
손이 닿는 순간, 놈이 내 손을 꽉 움켜쥐더니 "브라질 주짓수를 가르쳐 줄게"라며 내 팔을 잡아채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 했다. 순간적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손발에 잔뜩 힘을 주며 버티자, 놈은 장난을 치듯 내 허리춤을 붙잡고 교묘하게 몸싸움을 유도했다. 그렇게 몇 초간의 아슬아슬한 실랑이가 끝난 뒤, 놈은 씩 웃으며 '바이바이'하며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묘하게 서늘해진 바지 뒷주머니를 만져본 순간, 굳게 잠겨 있던 지퍼가 열려 있고 예비용 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3. 3초의 골든타임과 쩌렁쩌렁한 호통
지갑이 사라졌음을 인지하고 뒤를 돌아보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4초. 놀랍게도 그놈은 도망치지도 않은 채 불과 2~3미터 뒤쪽에 있었고, 뒤돌아서서 태연하게 내 지갑을 쫙 펼쳐보고 있었다. 동양인 노인네가 당장 알아채지 못할 거라는 오만함이었으리라. 놈은 경찰에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될 지갑 본체는 근처에 던져버리고, 이름표 없는 현금만 쏙 빼내려던 참이었을 것이다. 만약 놈이 지갑을 들고 멀리 도망가 버렸거나, 내가 몇 초만 더 늦게 알아챘더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나는 잽싸게 튀어 나가 놈에게서 내 지갑부터 확 낚아챘다. 그리고 그놈 목덜미를 붙잡았다. 지갑을 뺏기고 내게 덜미를 잡힌 놈의 눈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짧은 찰나, 내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젊은 시절의 혈기였다면 그 자리에서 화려한 이단옆차기로 피떡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지금의 나는 일흔의 노인이고, 여기는 타국이다. 놈이 흉기라도 꺼내면 곤란해진다. 나는 분노를 꾹 누르고, 대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쩌렁쩌렁한 호통을 뽑아냈다.
"폴리스! 픽포켓(Police! Pickpocket)!"
마침 멀리서 걸어오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확 쏠렸다. 위기를 직감한 놈은 내가 잡고 있던 팔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총총걸음으로 줄행랑을 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어왔고,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열어보니 카드와 현금은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나는 도망가는 놈의 비루한 뒷모습을 재빨리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이곳에 사진을 올리려고 찾으니 안 보인다. 아마 당시 내가 흥분이 진정되지 않아 폰 사진 버튼을 잘못 누른 모양이다.)
4. 베테랑 방랑자의 헛웃음과 새로운 교훈
크게 심호흡을 하며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제야 헛웃음이 났다. 바르셀로나 소매치기들의 그 유명한 '호나우지뉴 수법(격투기를 거는 척하며 시선을 분산시키는 기술)'에 당할 줄이야. 더구나 내가 넘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그 짧은 찰나에 지퍼까지 열고 지갑을 빼낸 놈의 손놀림은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무리하게 이단옆차기를 날리지 않고 호통으로 놈을 쫓아낸 것도, 노련한 대처였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지난달 카사블랑카에서 백팩을 잃어버린 후 고생했던 생각이 오버랩된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큰돈은 아니지만 짠물투어를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속 쓰린 액수였고, 빨리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엄청난 카드 비용이 날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문득 아쉬움이 밀려왔다. 기왕 지갑도 온전히 찾은 마당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놈에게 '너 기술 대단하다' 칭찬과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브이(V) 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이나 한 장 남겨둘 걸 그랬다.
바르셀로나 뒷골목에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첫째, 인적 없는 뒷골목은 안 가는 게 좋겠다. 둘째, '분산 차원'의 바지 뒷주머니는 그들에게 너무나 친절한 뷔페식당일 뿐이다. 내일부터 내 모든 귀중품은 무조건, 가슴 앞 어깨 가방에 넣고 꼭 붙들고 다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