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공카페가 없는 바르셀로나
1. 이방인의 '작업실' 찾기, 그 험난한 여정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쓸 만한 '카공(카페 공부/작업)' 아지트를 찾는 것이다. 현지인들의 일상에 섞여 젊고 활기찬 에너지를 느끼며 작업하는 시간은 방랑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니까.
하지만 유럽의 부자 나라들에서 맘 편히 노트북을 펼칠 카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비엔나나 프라하 같은 동유럽은 물론, 직전까지 머물렀던 리스본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유럽의 카페는 에스프레소 잔을 부딪치며 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공간이지, 혼자만의 작업에 빠져드는 사무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싼 커피값과 은근한 눈치에 쫓겨 결국 발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카페가 여의치 않으면 다음 선택지는 도서관이다. 3년 전 제주 서귀포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때처럼 쾌적한 도서관을 기대했지만, 이방인에게 해외 도서관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다. 현지 거주자가 아니면 출입증조차 내어주지 않는 곳이 수두룩했고, 가까운 일본 삿포로에서는 복잡한 예약 시스템에 쩔쩔매다 포기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대낮부터 낯선 타국의 숙소 방구석에 죽치고 앉아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는 건 영 기분이 나지 않으니, 새로운 도시마다 나만의 작업실을 찾아 헤매는 것은 늘 험난한 숙제였다.
2. 바르셀로나 동네 한복판에서 찾아낸 완벽한 오아시스
바르셀로나에 와서도 작업실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동네를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그러다 뜻밖의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지하철역 바로 옆에 자리한 훌륭한 동네 도서관이었다. 조심스레 들어가 보니 시설이 무척 쾌적하고 노트북 작업하기에도 완벽한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외국인인 내게도 흔쾌히 회원 등록을 해주고 번듯한 회원증까지 쥐여주었다. 바르셀로나 전 지역의 도서관과 무료 와이파이까지 쓸 수 있는 그 마법의 카드를 지갑에 넣는 순간, 이 도시에 완벽하게 스며든 현지 생활자가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위치도 기가 막힌다. 지하철역 바로 앞이라 접근성이 좋고, 주변에 식당과 마트 등 편의시설이 즐비해 노트북과 시간을 보내다 출출해지면 언제든 뛰어나가 요기를 할 수 있다. 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마트에 들러 장을 보기에도 그만이다. 맨 좌측의 조용한 자리가 어느새 나의 지정석이 되었다.
한 가지 낯선 점은 '운영 시간'이다. 수, 금, 토 요일은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지만, 나머지 요일은 오후 3시 가 되어서야 느지막이 셔터를 올린다. 일주일에 절반을 오후 늦게 여는 것은 점심을 길게 먹고 시에스타(낮잠)를 즐기는 스페인 특유의 여유로운 문화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기꺼이 도서관 시계에 내 일과를 맞췄다. 오전부터 문을 여는 수, 금, 토요일은 일찍 와서 시간 보내다가 오후에 시내를 걷고, 오후에 여는 날은 오전에 시내를 걷다가 느지막이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3. 텅 빈 바르셀로나의 도서관, 그리고 꽉 찬 한국의 노인들
그런데 200석 규모의 이 크고 고급스러운 도서관에 사람이 꽉 차는 법이 없다. 많아야 이삼십 명 남짓이고, 어떨 때는 덩그러니 나 혼자일 때도 있다. 그나마 앉아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뿐이다. 마을 한복판, 편의시설이 밀집한 이 좋은 공간이 이토록 텅 비어 있다니 의아했다.
자연스레 한국의 도서관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퇴직 후 찾았던 집 주변의 공공 도서관과 남산 도서관은 늘 사람들로 꽉꽉 차 있었다. 젊은이들은 취업을 위한 열공을 하고 있고, 퇴직한 5060들이 재취업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고독한 공부를 하고 있고, 백발 성성한 노인들 마저 신문과 책을 보면서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은 한국 도서관의 흔한 일상이다.
한국의 눈부신 고도성장과 스페인의 점진적인 경제적 퇴보가 혹시 이 도서관의 풍경 속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공부하고, 백발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배움의 열망을 품고 산다. 그 끝없는 지적 갈증이 오늘날의 한국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반면, 한때 'PIGS(남유럽 재정위기 국가)'로 불리며 경제적 몰락을 겪은 스페인의 현주소가 저 텅 빈 도서관 좌석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4. 광장의 생맥주와 도서관의 에어컨, 두 노년의 풍경
그렇다면 스페인의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노인들은 도서관 밖,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동네 광장(Plaza)의 벤치와 낡은 바(Bar)에 있었다. 한국의 은퇴자들이 도서관 에어컨 바람 아래서 지적 호기심을 채우며 치열하게 '현대적인 노후'를 보낼 때, 스페인의 노인들은 광장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일상을 '소비'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낫다 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배움과 성장을 향한 한국 노년층의 그 지독한 열정만큼은 타국의 텅 빈 도서관에서 새삼 유별나고 대단하게 다가온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엉뚱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노년이 되어서도 무언가를 배우겠다며 아등바등하는 한국의 노인들과, 광장에서 마음 편히 여유를 즐기는 스페인의 노인들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오래 살까? 통계를 찾아보니 놀랍게도 한국의 기대수명이 스페인보다 1년 남짓 더 길었다. 마음 편히 유유자적 노는 것보다, 늙어서까지 뇌를 굴리며 치열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라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늘도 도서관 시간에 맞추어 백팩을 둘러메고 숙소를 나선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방랑자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이 낯선 도시에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쾌적한 나만의 책상이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저 "아주 땡큐(Thank you)!"다. 이 완벽한 아지트에서 써 내려갈 바르셀로나의 남은 날들이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