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

나 홀로 여행객의 왓츠앱이 무거워지는 이유

by 야간비행

1. 리스본 에어비앤비의 터줏대감이 되다

리스본에 도착한 첫날부터 잃어버린 노트북을 찾느라 동분서주했지만, 숙소 생활만큼은 무척 즐거웠다. 내가 머무는 에어비앤비는 공용 숙소다. 방 4개에 주방, 그리고 화장실 세 개가 딸린 아파트인데, 각 방을 손님들이 사용하고 주인은 다른 곳에 산다. 평점이 높은 곳이라 방 4개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거의 매일 한두 명이 바뀐다. 보통 2~3일 정도 머물다 떠나는 다른 여행객들과 달리 나는 2주를 머물 예정이므로, 이곳에서는 내가 터줏대감인 셈이다. 모두 관광객이라 낮동안에는 마주칠 일이 별로 없지만, 아침 시간 주방에서는 종종 마주친다. 함께 식사 준비를 하기도 하고 식탁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기도 한다.


대부분이 나 홀로 여행객들인데 2030 여성이 가장 많고, 3040 남성과 5060 여성도 보인다. 한국에서 온 40대 남성도 이틀을 지내고 갔다. 통계치를 보면 나 홀로 여행객 전체를 100으로 봤을 때 2030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50~60%에 달한다고 한다. 혼자 여행하는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약 2배 이상 높다는 현장의 분위기를 나 역시 실감하는 중이다.


2. 낯선 이와 기꺼이 하루를 공유하는 일

아침 식사를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피어오른다. "오늘 어디 가세요?", "거기 가보니 어때요?"로 시작된 이야기는 종종 "나도 거기 아직 안 갔는데 오늘 같이 갈까요?"로 발전한다. 덕분에 2030 여성 여행객들과 어울려 시내와 근교 관광을 다녔다. 일본에서 온 20대 여대생 '유나'와는 근교 신트라 왕궁을, 중국에서 온 30대 직장인 '켈리'와는 카스카이스 해변을 함께 다녀왔다. 아시아계 여성들이 모두 유나, 켈리 같은 서양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재미있다.


유나와 신트라 왕궁을 둘러보던 중 우연히 프랑스 모녀 여행객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들은 두 살 배기 아들과 함께 리스본에 10일간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모녀는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녔는데, 왕궁과 주변 성곽이 산악 지형이어서 유모차를 끄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내가 옆에서 유모차 미는 것을 거들어주다가 금세 친해졌고, 나와 유나, 그리고 프랑스 가족 3명이 하루를 통째로 함께 다니게 되었다.


프랑스 가족은 60세 엄마 '요랑드'와 29세 딸, 그리고 2세 손주였다. 요랑드와 딸은 무척 친절했고, 좀 가까워 지자 프랑스에 오면 자기 집을 꼭 방문해 달라고 초청까지 했다. 흔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 듬뿍 담긴 초청이었다. 일본 여대생 유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다음 일정을 프랑스로 바꿨고,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

KakaoTalk_20260301_073726665_03.jpg 프랑스 '요랑드'가족, 일본 여대생 '유나'와 5명이 일행이 되어 신트라 궁성과 성곽을 관광함

3. 다시 그려보는 한 달 살이의 낭만

딸은 파리에 살고 엄마 요랑드는 파리 외곽의 시골에 살고 있는데, 집에 빈방이 여러 개 있으니 와서 그냥 지내라고 한다. 방값을 받을 기색도 아니니, 내년 프랑스 한 달 살이는 그곳으로 가볼 생각이다. 내가 좋다고 화답하자 요랑드는 폰을 꺼내어 시골집과 주변 풍경을 보여주며 자랑하고 자신이 잘하는 요리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내가 가게 된다면 내년쯤 60세 요랑드와 둘이서 프랑스 시골집에서 지내게 되는, 아주 로맨틱하고 특별한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작년 비엔나 여행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머물렀던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이 60세 '사비네'였는데, 그녀와 나 둘이서 한 집에서 한 달을 지냈다. 아침을 함께 만들어 먹고, 차를 마시고, 가끔 사비네의 친구들이 놀러 오면 다 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무척 이색적이고 따뜻한 경험이었다. 프랑스 여인 요랑드의 초청을 받아 파리 외곽 시골로 한 달 살이를 간다면, 오히려 완벽한 프랑스 현지인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기회가 될 것이다. 사비네와의 좋은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나는 그녀의 초청을 한결 더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나 홀로 떠나는 해외 방랑에는 이런 의외의 즐거움이 도사리고 있다. 남들은 해보기 힘든 이색적인 경험. 그리고 이 경험들은 내 삶을 한층 더 신선하고 풍요롭게 채워준다.


4. 낯선 문화가 주는 당혹감, 그리고 유쾌한 해프닝

함께 왕궁과 성곽을 둘러보던 중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딸이 자연스럽게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 아닌가. 과거 동남아를 여행할 때 현지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수유하는 모습은 본 적이 있지만, 젊은 서양 여성이 내 눈앞에서 가슴을 가리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젖을 물리니 순간 몹시 당황스러웠다.


눈을 둘 데가 없어 허공을 쳐다보며 당황해 하는데, 딸이 내게 말까지 건다. 말을 거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녀는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나 혼자 쩔쩔매며 촌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문화의 차이란 참으로 생경하고 묘한 것이다.


며칠 후, 중국 여성 '켈리'가 3일간 우리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그녀와 아침을 먹고 함께 카스카이스 해변으로 향했다. 혼자 다니는 것도 좋지만, 일행이 생기면 서로 사진을 찍어줄 수 있고 여행 작가로서 좋은 글감이 생기기도 해서 나는 길 위에서 맺는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켈리와 나란히 해변을 걷던 중, 저 멀리서 몹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세상에, 신트라 왕궁을 함께 돌았던 프랑스 가족이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말이 딱 맞다. 그런데 나를 발견한 엄마 요랑드가 흠칫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눈빛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졸지에 나는 '바람피우다 걸린 남자'처럼 몹시 이상하고 난처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KakaoTalk_20260301_073726665_02.jpg 중국 여성 '켈리'와 함께 카스카이스 바닷가

나는 황급히 요랑드와 딸에게 인사를 건넨 뒤 옆에 있던 켈리를 소개했다. "내 숙소가 방이 4개짜리라서 매일 손님이 바뀐다. 켈리는 어제 온 옆방 손님이고 내일 마드리드로 간다"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했다. 속으로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싶었지만, 영락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다 들킨 남자 꼴이 된 이 상황마저 그저 재미있기만 했다.


나의 다급한(?) 변명을 듣고 나서야 요랑드는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함께 다녀야 하나 헤어져야 하나 애매한 찰나, 다행히 프랑스 가족이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며 인사를 건네 자연스럽게 위기(?)를 모면했다.


5. 왓츠앱이 무거워지는 기분 좋은 여행

함께 여행한 중국 여성 켈리는 베이징의 직장인으로, 2주간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내년쯤 베이징에서 한 달 살이를 할 예정이라고 하니 꼭 연락을 달라고 한다.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주로 왓츠앱(WhatsApp)을 교환한다. 리스본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본의 유나, 중국의 켈리, 프랑스의 요랑드와 왓츠앱 친구가 되었다. 나 같은 방랑자에게 이 연락처들은 비상시 훌륭한 동아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훌륭한 여행 동반자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과거 베트남에서 만난 안나와 일본에서 만난 미찌꼬와 좋은 인연을 이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달까지 머물렀던 카이로, 튀니스, 카사블랑카는 이슬람 문화권이라 누군가와 만남을 갖는 것 자체가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유럽으로 넘어오자마자 마치 보상이라도 받듯 다채로운 인연들이 쏟아진다. 여행은 화려한 경치나 웅장한 역사 유적보다도, 결국 사람과의 만남과 인연이 훨씬 더 깊은 추억으로 남는 법이다.


누군가 나에게 나 홀로 떠나는 긴 여행이 외롭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리스본 해변에서의 이 아찔하고도 유쾌했던 해프닝을 들려줄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떤 낯선 이와 아침 식사를 나누고, 어떤 새로운 인연의 끈을 맺게 될까. 여행용 배낭은 꼭 필요한 것만 남아 갈수록 가벼워지는데, 내 스마트폰 왓츠앱에 쌓이는 전 세계 친구들의 목록은 기분 좋게 무거워진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온기, 그것이야말로 내 여행을 끊임없이 앞으로 굴러가게 하는 최고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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