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카페 여행의 재발견, 그리고 하루 8만 원의 호사

by 야간비행

1. 귀국 후 첫 여정, 고국의 푸근한 품을 찾아서

3개월간의 아프리카와 유럽 대장정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2주일간 한국에 머물며 건강검진과 재정비를 마친 뒤, 다시 5개월간 발칸반도를 누비는 긴 여정을 떠날 예정이다.


나는 해외 체류를 마치고 돌아오면 꼭 국내 여행 카페에서 주관하는 '당일치기 버스투어'를 다녀온다. 몇 달간 타지를 떠돌다 보면 얼큰한 한식이 간절해지듯, 한국의 익숙하고 푸근한 산야가 몹시도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나 홀로 해외를 누비며 내심 갈증을 느꼈던, 사람들의 온기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기도 하다.


2. 40명 중 38명이 여성? 청일점이 된 투어 버스

아침 8시, 교대역에서 출발하는 투어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버스 안 풍경이 묘하다. 40명 정원에 부부는 한 팀이고, 나머지 38명 중 여성이 36명, 남자는 고작 나를 포함해 2명뿐이다.


내 좌석인 맨 뒷자리로 가기 위해 좁은 통로를 걸어 들어가는데, 여성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힌다. '저 백수는 여자들 여행 가는 데 왜 왔지?' 하는 표정들이다. 5060 세대가 모이는 곳엔 으레 여성이 많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성 95%에 남성 5%라는 비율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카페 운영자에게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길래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항상 이래요. 버스 정원 40명 중 남자가 5명을 넘긴 적이 별로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2022년 퇴직 직후 동네 문화센터에서 요가와 스트레칭을 신청했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접수대 직원은 내게 "그 반은 전부 여성분들뿐인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었었다. 지난 2년간 남성 수강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말에 짐짓 놀라긴 했지만, 눈 딱 감고 등록을 강행했다. 요가 수업 첫날, 여성들만 있는 곳에 내가 들어갔더니 '저 사람 뭐야?'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여성들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착 달라붙은 요가복 차림의 여성들 틈에서 민망한 자세를 취할 땐 서로 난감한 순간도 있었지만, 나는 꿋꿋하게 여성들 틈에서 요가를 하고 스트레칭을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 강사가 나에게 "회원님이 오시니 다른 여성 회원분들이 더 열심히 하시고, 가끔 진상을 부리던 분들도 얌전해지셨다"며 제발 결석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을 시작하면서 문화센터는 그만두었지만, 당시에도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남자들은 안 할까?' 부끄러워서일까, 아니면 정말 관심이 없는 걸까. 그리고 오늘, 덜컹거리는 투어 버스 안에서 그 오래된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행지에는 왜 60대 여성이 넘쳐나고, 내 또래의 한국 퇴직 남성들은 보이지 않는 걸까. 다들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20260403_113646.jpg 여성이 95%인 여행카페 일일투어 버스

3. 수렵채집의 본능이 뒤바뀐 이유

인간은 수백만 년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남성은 사냥을 위해 무기를 들고 먼 곳으로 이동했고, 여성은 집 주변에서 채집 활동을 하며 자녀를 돌보았다. 논리대로라면 남성에게 '이동의 유전자'가, 여성에게 '체류의 유전자'가 강하게 남아있어야 마땅하다. 석가모니 시대의 인도나 과거 동양의 역사만 보아도, 은퇴 후 세상을 방랑하는 쪽은 늘 남자였고 집을 지키는 쪽은 여자였다. 그런데 왜 현대에 이르러 이 공식이 뒤집힌 것일까?


흔히들 나이가 들면 남성은 남성 호르몬이 줄면서 여성화되고 반대로 여성은 남성 호르몬이 늘어나 활동적이 된다고 한다. 여성은 폐경 이후 '여성 호르몬'이 급감하면서, 체내에 본래 존재하던 소량의 남성 호르몬 성향이 상대적으로 도드라지게 되어 활동적이 되는 반면, 남성은 평생 자신을 끓어오르게 했던 남성 호르몬이 점차 고갈되면서 활력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남녀 모두 호르몬이 역전되는 50대 중반까지 살지를 못하였지만,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현대에는 50대 중반 이후 이 생물학적 변화가 발현되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리라.


사회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듯, 여행은 즐겁지만 동시에 에너지가 많이 드는 행위다. 60대 남성들은 수십 년간 치열한 직장 생활이라는 '사냥'을 마친 상태다. 은퇴 후에는 낯선 환경에 뛰어들어 사서 고생하기보다는 익숙한 동굴(집)에서 쉬고 싶어 한다. 반면 60대 여성들은 평생 짊어졌던 자녀 양육의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완벽한 여유를 얻는다. 남편마저 퇴직하니 굳이 집을 지키고 있을 명분도 사라졌다. 게다가 여성들은 평생 학부모 모임이나 이웃 간의 교류를 통해 '낯선 사람과 유연하게 어울리는 사교성'을 탄탄하게 길러왔다. 혼자 투어 버스에 훌쩍 올라타 옆자리에 앉은 낯선 여성과 금세 수다 떨며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60대 여성들을 집 밖으로 이끄는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반대로 남성들은 직장에서 상하 관계나 이해관계로 얽힌 인맥에만 익숙하다. 은퇴 후 직책과 계급을 떼고 아무 상관없는 낯선 타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본능적으로 불편해한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요가 교실이나 투어 버스 대신, 과거부터 잘 알던 친구들과 당구를 치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익숙한 영역에만 머물려하는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여성은 남성들이 많은 곳을 가더라도 자연스러운 반면, 남성들은 여성들이 많은 곳에 가면 주눅이 들었던 심리적 요인도 있을 것이다. 여행 버스에는 항상 여성들이 많으니 그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져서 더욱 탑승이 꺼려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부가 함께 여행을 오면 되지 않을까? 이 역시 현실적인 장벽이 존재한다. 평생 밖에서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로 남편 뒷바라지를 해왔던 여성들에게, 백수가 된 남편을 여행지까지 데려가 챙겨야 하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완벽한 해방감과 자유를 위해, 여성들은 기꺼이 남편을 집에 두고 동성 친구들과 함께하거나 나 홀로 여행을 택한다.


4. 하루 8만 원의 완벽한 호사, 국내 투어의 재발견

세상의 심리야 어찌 되었든, 오늘 하루 나의 버스 투어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아침 8시에 출발한 버스는 무려 13시간 동안 알찬 여정을 소화하고 밤 9시가 되어서야 출발지로 돌아왔다.


그 시간 동안 충남 서산의 고즈넉한 유기방 가옥과 샛노란 수선화 축제를 즐겼고, 보령 앞바다에 떠 있는 죽도 상화원을 산책했으며, 서천 마량리의 붉은 동백나무 숲에서 봄의 절정을 만끽했다. 관광이 목적인지 맛집 탐방이 목적인지 모를 정도로 서해안의 맛집에서 감동적인 식사도 즐겼다. 점심에는 보령의 유명 맛집인 '무한리필 밥도둑 간장게장' 집에서 오로지 간장게장의 속살로만 배를 채웠다. 무한리필 간장게장을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짠 게장에 입술이 절여져 한동안 얼얼할 정도였다. 내 평생 게장 속살로만 배를 채운 기념비적인 식사였다. 저녁에는 점심때의 간장게장으로 아직 배가 덜 꺼진 상태여서 건너뛰고 싶었으나, 서천 바닷가 식당에서 쫀득한 주꾸미 샤부샤부를 보는 순간 이성을 잃고 폭풍 흡입할 수밖에 없었다.

KakaoTalk_20260404_115945251.jpg 밥도둑 간장게장
KakaoTalk_20260404_115910181.jpg 쭈꾸미 샤부샤부

하루 여행치고는 가성비가 환상적이었다. 13시간 동안 수백 킬로미터를 편안하게 누빈 버스 관광 비용이 고작 3만 원으로 거저나 다름없는 파격적인 가격이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간혹 일일 버스투어를 하는데 하루 비용이 보통 100유로(약 17만 원) 정도였다. 해외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의 투어 상품이 있었다면 수시로 탔을 것이다. 다음 주 아테네에서 메테오라 공중수도원으로 가는 버스투어를 예약하려고 보니 무려 120유로(약 21만 원)나 된다. 우리나라 물가가 만만치 않다지만 버스투어 가격만큼은 동남아 수준이다. 한국 사람들의 여행 사랑이 워낙 크고 수요가 많다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으로 투어가 가능한 것 같다.


비록 점심과 저녁 식대로 5만 원이 추가로 들었지만, 서울이었다면 그 두 배를 주어도 결코 맛볼 수 없는 산지 직송의 싱싱하고 황홀한 맛이었다. 함께 식사하던 여성 회원이 엊그제 서울에서 5만 원 주고 먹은 간장게장보다 훨씬 싱싱하고 맛있다며 감탄하는 것을 보고, 나 역시 오늘의 식사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새삼 깨달았다. 저녁 식사로 먹은 주꾸미 역시 펄펄 살아있어서 끓는 육수에 넣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번 버스 여행은 이래저래 행복했다. 지난주까지 3개월간 아프리카와 유럽의 절경들을 돌고 왔는데, 오늘의 서해안 버스투어에서 그 못지않게 훨씬 큰 행복감을 느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 8만 원의 지출이 부담일 수도 있겠지만, 매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쯤 이런 여행을 즐길 수 있다면 남은 인생이 얼마나 풍요로울까. 오늘은 특별히 비싼 특식을 골라 식대가 5만 원이 나왔지만, 찾아보면 만 원 안팎으로 즐길 수 있는 맛있고 소박한 메뉴도 얼마든지 많다. 하루 5만 원 남짓한 비용으로 흐드러진 수선화와 동백꽃의 향연에 취하고, 시원한 서해를 바라보며 차 한 잔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완벽한 가성비가 어디 있을까.


이국적인 풍경과 낯선 자극이 가득한 해외여행도 분명 훌륭하지만, 우리 산야를 누비는 국내 여행에는 해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깊고 따뜻한 낭만이 있다. 유명 관광지의 바가지요금에 눈살 찌푸릴 일 없이, 여행 카페의 잘 짜인 일정을 영리하게 활용하면 이토록 저렴하면서도 속이 꽉 찬 여행이 가능하다.


지난 3개월간 아프리카와 유럽의 거대한 무대를 누비면서도 미처 채워지지 않았던 작고 따뜻한 감성들을, 온전히 한국의 품 안에서 가득 채웠던 유쾌한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텅 빈 무대 바르셀로나에서, 나의 뮤즈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