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00일, 길 위에서 건강을 지키는 나만의 생존법
1. 방랑자의 걱정거리
나는 1년에 3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떠도는 방랑자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전 세계를 유목민처럼 누비고 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늘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이 하나 있다. '말도 안 통하는 이 낯선 이국땅에서 덜컥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다.
2. '걸어 다니는 약국'이 되어도 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과거에는 최상의 컨디션일 때만 해외로 향했다. 행여 몸이라도 아플까 봐 여행을 앞두고는 등산이나 심한 운동마저 삼갈 정도로 몸을 사렸다. 몸이 약간이라도 정상이 아니면 여행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환갑 기념으로 떠난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서, 산 정상에 오른 한 남자를 만났다. 보스니아 사람이었는데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가 절단되어 의족을 하고 있었다. 의족을 차고 목발을 짚으며 그 험한 안나푸르나를 올라온 그를 보는 순간, 쌩쌩한 몸으로 여행하면서도 이런저런 걱정만 안고 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아들의 손을 잡고 안나푸르나를 올라온 시각장애인도 있었다고 한다. 여행은 몸이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작년 이스탄불의 유명 모스크 아야소피아 앞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걷던 시각장애인 부부가 트램 철로 앞 턱이 진 곳에서 당황해하고 있었다. 마침 곁에 있던 내가 손을 이끌어 철로를 건너도록 도와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낯선 길을 나선 부부를 보면서, 허리가 좀 아프다거나 머리가 띵하다는 이유로 계획된 여행을 포기하는 것은 핑계이자 비겁함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당시 나는 무척 궁금했다. 시각장애인이 왜 아야소피아를 찾기 위해 그 힘든 걸음을 했을까? 역사 유적의 벽면이라도 직접 만져보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거대한 공간에 밴 냄새라도 맡아보고 싶었던 걸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작년 페루 쿠스코의 한 박물관에서 어렴풋이 찾을 수 있었다. 십여 명의 시각장애인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만져볼 수 있는 유물들을 직접 손으로 더듬어가며 교감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생생한 이야기와 손끝에 닿는 잉카 문명의 질감이 그들에게는 곧 눈이자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벅찬 표정을 보며, 나는 조금 아프다고 길을 멈추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비겁한 핑계일 뿐이라고 다시금 확신했다..
이후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눈이 안보이거나 목발 짚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일단 길을 떠난다. 2년 전, 동남아 3개월 여행을 출발하기 1주일 전 왼팔 전체가 찌릿찌릿하면서 잠을 자기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온 적이 있다. 병원에 갔더니 목디스크(경추 추간판 탈출증)로 인해 팔과 다리로 가는 신경이 눌렸다고 했다. 출발 1주일 전이라 서둘러 물리치료를 받았는데, 떠나는 날까지도 병원 신세를 졌다. 머리를 위로 당겨 디스크를 누르는 압력을 줄여주는 견인 치료였다.
떠나기 전날, 나는 의료기기 판매점에 달려가 머리를 위로 잡아당기는 물리치료기(목 견인기)를 사 들고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말레이시아 숙소 문에 그 기기를 매달고 매일 몇 번씩 자가 치료를 했다. 1주일쯤 지나니 다행히 증세가 호전되었고, 무사히 세 곳의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마칠 수 있었다.
여행 출발 전 아플 때를 대비해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약을 충분히 챙겨서 떠난다. 한국을 떠날 때면 내 배낭 한구석에는 늘 한 보따리의 약이 담겨 있다. 감기약, 배탈약, 소화제, 진통제, 지사제는 기본이고 상처 연고에 알레르기, 디스크, 피부약까지 챙기다 보면 내 배낭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약국'이 된다.
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나는 지난 2년 동안 이 약들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작년 7월 험준한 차마고도를 걷다 먹은 감기약이 마지막이었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약봉지들을 쓰레기통에 버릴 때마다, 나는 무사히 여행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신에게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내가 이토록 건강하게 길 위를 걷는 비결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매일 걷고, 잘 챙겨 먹고, 간절히 기도하는 일상의 반복 덕분이다.
3. 비가 와도 걷는다, 하루 만보의 철칙
현지에 도착하면 아프지 않기 위해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다. 나의 첫 번째 생존 법칙은 '무조건 걷기'다. 공원이 좋은 곳에서는 2만 보, 복잡한 시내에서는 최소 1만 보를 걷는다. 걷는 것 자체가 내 건강의 가장 든든한 적금이기 때문에, 날씨는 결코 핑계가 되지 못한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서라도 기어코 밖으로 나가 하루의 목표치를 채운다. 낯선 골목의 질감을 발끝으로 느끼며 걷다 보면 몸의 군더더기가 빠지고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걷는 것은 현지 생활을 체험하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기도 하다. 공원과 도시의 대로, 그리고 뒷골목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현지인들의 생생한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관광과 건강을 동시에 챙기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 된다.
4. 쌀죽과 라면 수프, 그리고 마트표 전기구이 통닭
두 번째 비결은 '영양의 균형'이다. 아무리 현지식이 맛있어도 장기 여행자에게 최고의 보약은 우리네 곡기다. 한국에서 챙겨 온 누룽지로 간단히 요기를 하기도 하지만, 주방이 있는 숙소에서는 마트에서 쌀을 사다 밥을 끓여 먹는다. 다행히 세계 어디를 가든 마트에서 쌀을 판매한다. 찰기 없이 길쭉한 안남미가 많긴 해도,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둥근 쌀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외국 숙소에는 대부분 전기밥솥이 없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냄비밥을 해야 한다. 불 조절을 하며 냄비밥을 짓는 게 쉽지만은 않지만, 어차피 물을 붓고 다시 쌀죽으로 끓여 먹을 것이라 밥이 좀 질거나 설익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한 번에 서너 번 먹을 분량의 밥을 지어 알맞게 소분한 뒤 냉장고에 넣어두면, 장기 여행자를 위한 가장 훌륭하고 든든한 생존 식량이 된다.
나만의 특식이 있다면 부드럽게 끓여낸 쌀죽에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 수프를 살짝 풀고 계란 하나를 톡 떨어뜨리는 것이다. 쌀쌀한 이국땅에서 이 뜨끈한 죽 한 그릇을 비우면 뱃속이 편안해지고 온몸에 훈기가 돈다. 재미있는 것은 입맛의 변화다. 예전엔 김치가 아쉬웠지만, 요즘은 죽에 곁들여 먹는 현지 '올리브 절임'의 매력에 푹 빠졌다. 비타민도 풍부하고 맛도 훌륭해 이제는 김치 자리를 완벽히 꿰찼다. 여기에 제철 과일과 요구르트를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아침 식사가 완성된다.
하루 두 끼를 먹는 내게 저녁은 단백질 보충의 시간이다. 식당에서 분위기 잡고 칼질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현지 물가를 감안하면 마트가 최고의 식당이다. 유럽 마트에는 전기구이 통닭을 마리 단위, 혹은 닭다리만 따로 팔기도 한다. 닭다리 한두 개에 신선한 양배추와 빵, 그리고 저렴한 와인 한 병을 사 와 숙소 식탁에 펼쳐 놓는다. 식당에서는 20유로가 훌쩍 넘을 만찬이, 내 방에서는 5~10유로면 단백질, 탄수화물, 비타민이 완벽히 갖춰진 최고의 영양식이 된다. 의도적으로 매일 영양소를 골고루 챙겨 먹다 보니, 화장실 가는 일도 매일 규칙적이고 편안하다.
5. 하루 9시간의 꿀잠, 그리고 만물에 올리는 기도
매일 만 보 이상을 걷고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면, 밤에는 어김없이 깊은 잠이 쏟아진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낯선 침대에서도 매일 9시간씩 달게 잔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게 최고의 건강이다.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서 인지, 3년 넘게 해외를 떠돌았지만 여행을 출발했던 3년 전보다 오히려 전반적인 건강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아마도 한국의 추운 겨울엔 따뜻한 동남아나 아프리카로 피하고, 한국의 무더운 여름엔 시원한 나라에서 지내는 '기후 피난' 덕분도 클 것이다.
그리고 여행 중 빼놓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기도'다. 성당이든 사원이든 모스크든 종교 시설이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 고개를 숙인다. 심지어 압도적인 대자연 앞에서도 두 손을 모은다. "부디 남은 여정 동안 내 건강을 지켜주십시오." 종교를 초월해 만물에 의지하고 간절히 비는 이 행위 자체가, 내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명상일지도 모른다.
6. 건강검진과 재충전, 멈추지 않는 여정
최근 3개월간의 아프리카, 유럽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학병원에서 위암 5년 차 추적 검사를 마쳤다. 5년 전 내 몸에 위암이 발견되어 시술을 받았고,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추적 검사의 마지막 관문이다. 이번 검사에서 이상이 없으면 비로소 '완치' 판정을 받게 된다.
건강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지만, 나는 길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매일 만보 이상 걸으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5년의 시간을 묵묵히 이겨내고 전 세계를 씩씩하게 누비고 있는 70세 방랑자의 가장 위대한 생존법이다. 다가올 아테네와 5개월간의 발칸 대장정에서도, 나는 기꺼이 걷고 또 먹으며 씩씩하게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