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간의 발칸반도 여행을 시작하며

6개월간 발칸반도와 알래스카 여행

by 야간비행


1. 위암 완치, 6개월 장기 방랑의 닻을 올리다

2026년 1, 2, 3월, 3개월간의 북아프리카와 유럽 여행을 마치고 4월에 잠시 귀국하여 건강검진을 받았다. 5년 전 위내시경 검사 중 위암이 발견되어 시술로 제거한 후, 5년 동안 매년 추적 검사를 해왔다. 올해가 마지막 검사였는데, 다행히 더 이상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아 위암 완치 통보를 받았다. 초기에 발견해 제거했기에 큰 걱정은 안 했지만, 매년 3월 말이면 피를 열 통(손가락 만한 통) 넘게 뽑고, 꼬박꼬박 CT 촬영과 위·대장 내시경을 받아야 했다. 조직검사를 대비해 수면내시경을 해야 했고, 그때마다 가족을 동반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게다가 검사 후에는 약을 한 보따리씩 받아와 해외여행 중에도 챙겨 먹어야 했다.


무엇보다 해마다 3월 말이면 검진을 위해 무조건 귀국해야 했기에 여행 일정을 짜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수술 후 5년 이내에는 보험 가입도 까다로워 여행자 보험조차 질병을 제외하고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완치 판정을 받았으니 암에 대한 걱정을 던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해외여행에서 여행자 보험도 제한 없이 가입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을 계획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럽다.


2주간의 검진과 휴식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 여행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3개월 정도 여행 후 잠시 귀국해 쉬었다가 다시 나가는 식이었지만, 이번 여행은 무려 6개월짜리 장기 프로젝트다. 4개월에 걸쳐 발칸반도를 한 바퀴 돌고,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여행을 이어갈 계획이다. 해외 방랑 초기에는 여러 걱정으로 한두 달 만에 귀국했고, 이후에는 3개월로 늘렸는데, 이제는 자신감이 생겨 여행기간을 6개월로 늘렸다. 굳이 한국에 꼭 들어와야 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중간에 귀국했다 다시 나가는 데 드는 추가 경비와 체력 소모를 줄이기 위함이다. 이번에도 바르셀로나에서 귀국하지 않고 바로 아테네로 넘어왔더라면 시차로 인한 체력 소모와 항공 경비를 꽤 절약했을 것이다.


2. 여행의 진화: 현지인이 되기 위한 '무료함'의 시간

올해 초 3개월간의 여행은 과거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작년까지는 '한 달 살기'나 '배낭여행' 형태로 구분하여 여행을 했었지만, 올해부터는 2~3주 단위의 체류형 여행으로 스타일을 바꿨다. 한 도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거점 도시를 정해두고 주변 지역을 함께 둘러보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카이로에 3주간 체류하면서 2박 3일 일정으로 룩소르를 다녀오고, 일일 버스 투어로 알렉산드리아를 다녀온 것이 그 예다.


지난 3년간의 여행을 복기해 보면, 새로운 도시에서 활력을 느끼는 기간은 길어야 1주일이다. 2주 째는 현지인의 생활에 스며들기는 하지만 온전히 살아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다 3주째가 되면 서서히 무료해지고 동네를 배회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비로소 그곳에서 살아본 듯한 어렴풋한 인식이 싹튼다. 3주를 지나 한 달이 되면 그 무료함이 길어지면서 내가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이 된 것처럼 도시에 대한 친근감이 생겨난다. 한 도시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봐야 그 도시에서 살아봤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지금까지 15개 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보니 도시에 스며드는 삶에도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2~3주 체류형 여행으로 전환한 것이다.


3. 예측 불가의 여정: 강철 여전사 안나와의 3개월 동행

4월부터 시작하는 6개월간의 여정은 지금까지와 차별되는 또 다른 형태의 여행이 될 것이다. 나 혼자만의 여행이 아닌 동행이 있기 때문이다. 5,6,7 3개월은 조지아에서 날아온 27세의 씩씩한 여전사 안나와 그리고 8월 이후는 미국의 지인과 함께하게 된다. 4월 한 달은 나 혼자 아테네와 키프로스에서 2주씩 체류하며 여유를 즐기고, 이후 3개월은 배낭여행 모드로 전환해 안나와 발칸 전역을 샅샅이 뒤질 예정이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지인과 합류해 교대로 운전을 하며, LA에서 캐나다를 거쳐 알래스카의 야생까지 여유롭고 느긋한 로드트립을 즐길 것이다.


이 6개월의 일정 모두가 내게는 가슴 뛰는 새로운 도전이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일 때는 내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지만, 동행이 생기면 서로의 생체리듬과 여행 스타일을 맞춰야만 한다. 여행 전반부는 20대 후반의 안나와, 후반부는 70대 중반의 지인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세대를 아우르는 난이도 높은 인간관계의 기술이 필요한 여행이다.


혈기 왕성한 20대 안나와의 여행은 한 도시에 2~3주씩 진득하게 머물 수가 없다. 안나는 매일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사진과 영상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고 싶어 한다. 반면 나는 여유롭게 머물며 도시를 살피고 현지인처럼 살아보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한 도시에 1주일씩 머물며 주변의 볼거리를 찾아 일일 버스 투어를 하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각자가 하고 싶은 일정을 보내기로 했다.


통통 튀는 20대와의 동행은 그야말로 예측 불가다. 70대 할아버지와 20대 손녀의 여행이 될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연인의 로맨스 여행이 될지, 아니면 노병과 여전사의 험난한 행군이 될지 미지수다. 안나는 보통의 아가씨가 아니다. 험준한 4천 미터 급 코카서스 산맥을 며칠씩 비박하며 종주한 강철의 여전사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 배낭을 메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있다. 나는 10년 전 친구들과 안나푸르나를 다녀왔다. 당시 포터와 요리사까지 대동하고도 숨을 헐떡였는데, 안나는 홀로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비상식량을 씹으며 내가 걸었던 그 길을 걷고 있다. 안나푸르나 여행 2주일 동안의 예산이 250불이라고 하니 거의 무전여행이나 다름없다.


나는 20대 때 노숙과 걸식을 하며 국내 무전여행을 했었는데 안나는 히치하이킹과 노숙을 하며 해외 무전여행을 하고 있다. 주변인들이 나의 무모함에 놀라는데 안나는 나보다 더한 용기와 배짱이다. 혈기왕성했던 20대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동질감이 느껴진다. 아마 이런 동질감 때문에 안나와 내가 여행 동반자가 되었을 것이다.


열흘씩 샤워도 못 하고 춥고 잠잘 곳도 변변치 않은데 괜찮겠냐는 내 물음에, 안나는 "어릴 적 더 험한 환경에서도 살아봐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씩씩하게 답했다. 그런 강단 있는 여전사와 둘이 3개월간 8개국을 누빌 생각을 하니 기대 반, 걱정 반이다. 42년 나이 차이만큼이나 커다란 세대 차이, 조지아와 한국의 문화 차이, 20대의 강철 체력과 70대의 생존 체력, 서로 다른 관심 분야, 저녁형 인간과 새벽형 인간의 차이 등 모든 것이 다른 두 사람이 3개월간 24시간 붙어 지내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다행히 둘다 여행을 통해서 최고의 행복감을 느끼고 불편함 마저 즐기는 공통점이 있기에, 많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설레는 여행이 될 것이다. 이 3개월간의 좌충우돌 여정을 잘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볼 생각이다.

여전사.png 여전사 안나
신.jpg 안나와 룩소르 신전에서

4. 태고의 신비를 향해: 알래스카 야생 속으로의 로드트립

8월의 알래스카 로드트립도 기대가 크다. 2년 전 캠핑카로 유럽 전역을 누볐듯이 이번에는 LA에서 캐나다를 거쳐 알래스카를 오가며 광활한 대자연의 풍광을 즐길 것이다. 알래스카에서는 하루 종일 운전해도 사람 구경 할 수 없는 완전한 야생 속으로 들어가서 태고의 신비를 경험해 볼 것이다. 차에 기름통 몇 개와 식량을 싣고 가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를 차박을 하면서 방랑해 볼 생각이다.


5. 아테네의 씁쓸한 풍경, 그리고 부활절의 기도

지금 나는 이 기나긴 6개월 여정의 첫 기착지인 아테네에 있다. 앞으로 유명 역사유적들을 둘러보면 또 다른 감회가 밀려오겠지만, 버스 차창 너머로 본 시내 풍경과 숙소 주변의 주택가는 다소 가난한 유럽 국가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 머물렀던 리스본이나 바르셀로나보다는 차라리 아프리카의 카사블랑카나 튀니스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이집트의 위대한 고대 유적과 현재 카이로의 무질서가 묘한 이질감을 주듯, 민주주의와 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현재 아테네의 뒷골목 풍경도 쉽게 매칭되지 않는다. 조상들의 화려한 유산과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팍팍한 삶이 대비되는 모습은 여러 나라에서 목격되곤 하는데, 이곳 아테네에서도 비슷한 씁쓸함을 느낀다. 조상들이 물려준 수수함을 딛고 일어나 세계적인 강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새삼스레 자랑스러워지며, 가슴 한구석에서 훈훈한 국뽕이 차오른다.


6개월 대장정의 첫날을 보내는 오늘이 그리스 정교회의 부활절이다. 이번에는 꽃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그리스 정교회 성전에 가서 6개월 대장정의 안전과 무사귀환을 기도해야겠다.

숙소.jpg 아테네 숙소 주변 주택가 모습
정교회.jpg 부활절을 준비중인 그리스 정교회


작가의 이전글긴 해외여행 중 건강관리: 70세 방랑자의 생존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