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물관의 입장료가 들려주는 이야기

문화유산은 소유의 대상인가, 공유의 자산인가

by 야간비행


퇴직 후 시작한 세계 유랑 3년 차. 나는 해외를 떠돌며 여행하는 동안, 방문하는 도시의 박물관을 가장 먼저 찾는다. 박물관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철학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나는 세계의 유명 박물관들을 섭렵했다. 때로는 웅장한 규모와 압도적인 유물에 감탄했고, 때로는 빈약한 전시품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많은 박물관들을 다니며, 유물만큼이나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입장료'였다.


유럽의 대형 박물관들은 대부분 입장료가 내외국인 모두 20유로(32,000원) 정도로 비싼 편이다. 국민소득이 유럽보다 훨씬 낮은 이집트나 이스탄불 박물관도 한화 30,000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다. 비싸긴 하지만 어마어마한 소장품의 가치 때문에 수긍이 된다. 소장품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는 노력이 눈에 보여 납득이 가는 경우도 많다. 이스탄불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과 아야소피아 등 유적지마다 철근 지지대를 설치하고 보수 공사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몇 달 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걸으며, 이 땅에서 출토된 인류 문명의 유산을 유지하는 데 나의 입장료가 기여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했다. 비엔나 군사박물관의 3.5유로라는 저렴한 입장료는 국민들의 안보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임을 알기에, 그 가성비에 만족하며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서사를 찬찬히 음미했다.


그러나 납득하기 어려운 입장료 정책을 만났을 때는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지난해 한 달 살기를 했던 대만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관이 그랬다. 대만 국민에게는 150대만 달러(7000원)인 입장료가 외국인에게는 350대만 달러(16000원)였다. 국민소득이 3만 5천 달러가 넘는 부유한 나라가 인도, 캄보디아 같은 가난한 나라들이 외화벌이를 위해 사용하는 정책을 하는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어린 시절 '세계 4대 박물관'이라는 전설을 듣고 품었던 동경은 빈약한 유물과 불합리한 입장료 앞에서 실망으로 변했다. 한편 지난주 방문한 몽골 박물관은 자국민 1만 투그릭(4000원), 외국인 2만 투그릭(8000원)으로 두 배를 받았지만, 1인당 소득 5천 달러 수준의 가난한 국가임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최근 한국 국립박물관이 외국인 관람객 수 세계 5위를 기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수많은 박물관을 방문했던 내가 그 이유를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입장료 '무료'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국립박물관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전쟁기념관, 그리고 국립공원까지 내외국인 모두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국립박물관, 전쟁기념관의 규모와 소장품 수준을 보면 2만 원 정도의 입장료를 받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내가 방문했던 다른 국가들의 입장료는 대략 괜찮은 식사 한 끼 값이었다. 몽골 8천 원, 대만 1만 7천 원, 그리고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3만~3만 5천 원 수준이다. 한국의 박물관을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우리 정부가 근사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니는 셈이다.


우리나라 말고도 내외국인에게 박물관이 무료인 나라들이 있다. 미국과 영국은 세계 리더 국가답게 여러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료다. 중국의 란저우 박물관은 유일하게 내국인은 유료지만 외국인은 무료이다. 내외국인 65세 이상 시니어들은 무료인 국가도 있고, 무료는 아니지만 시니어 할인을 해주는 국가는 많다. 체코는 65세 이상 내외국인 시니어가 무료이며 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은 60세 또는 65세 이상 시니어에게 내외국인 모두에게 할인을 해준다. 그러나 이집트, 터키등 저소득 국가는 자국 시니어는 무료이면서도 외국인 시니어는 제가격이다. 고소득 국가로는 유일하게 대만만이 자국시니어는 무료이면서 외국 시니어는 할인도 없이 제가격을 받는다. 중국과 대만의 차이가 극명하다. 입장료 정책을 보면 그 나라의 철학과 외국인, 시니어를 대하는 태도가 보인다.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의 무료 정책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 리더국가인 미국, 영국, 중국 보다 더 통 큰 정책을 펴고 있다. 이는 외국인 방문객에게 단순히 재정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을 넘어선다. 대한민국의 품격을 드높이는 탁월한 문화 전략이다. 외국인에게 방문국가의 첫인상은 그 나라의 얼굴과도 같은 공항과 박물관에서 결정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천공항에 이어, 수준 높은 전시를 자랑하는 박물관까지 외국인에게 무료로 개방하는 것은 방문객들에게 한국에 대한 긍정적이고 깊은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 외화 수입보다 훨씬 큰 가치를 창출한다. 한국을 방문한 이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무료로 체험하고 돌아가면, 그들의 마음속에 한국은 ‘너그러운 문화 강국’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는 비즈니스, 투자, 그리고 전반적인 국가 호감도로 이어지는 강력한 자산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전략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삼성, LG, 현대의 제품을 볼 수 있으며, K-뷰티와 K-푸드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상황이다. 한국을 방문하고 좋은 인상을 받은 외국인들은 한국 제품에도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질 것이다.


유물을 소장하는 방식과 입장료 정책은 그 나라의 정체성과 철학을 대변한다. 어떤 나라는 유물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고 돈을 벌고자 한다. 그러나 한국은 문화유산을 모든 이와 공유해야 할 인류의 자산으로 여긴다. 이러한 수준 높은 사고가 한국을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여러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그 국가의 역사와 철학을 가늠할 수 있었다. 몽골의 초라한 박물관에서 유목민의 자유로운 삶 자체가 유물이라는 역설을 배웠고, 유럽의 화려한 박물관에서 역사의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대만에서 불쾌한 경험을 통해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되돌아보았고, 한국 박물관의 정책에서 문화 강국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박물관의 입장료는 단순한 가격표가 아니다. 그 안에는 한 나라의 정체성과 철학, 그리고 관광객에 대한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계를 유랑하는 나는, 오늘도 박물관 입장권 한 장을 통해 그 나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음미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몽골 한달살이: 박물관에서 만난 제국의 초라한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