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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Jan 19. 2021

4. 멈추지 마

글쓰기의 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생각보다 지루하기도, 그러면서도 초조함을 안겨주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노력하다가 잃는 쪽을 택하였다. 노력하다가 잃는 쪽이라니 무슨 말인가. 처음에 무작정 나의 문제와 고여있는 감정을 글로 적을 때는 벌판에서 매서운 칼바람을 맞는 듯하였다.


아무도 몰랐던 일을 굳이 쓰고자 하니 나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을 앞세워 행복을 갉아먹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우아한 가면도 벗어야 했다. 글은 과거와 현재를 파도 타듯 넘나들며 시간 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젊은 날의 사랑과 이별 후 맞이한 현실의 결혼은 내가 어떠한 풍파에도 올곧은 사람도, 마음이 단단한 사람도 아니었음을 알게 하였다. 동시에 나의 현실을 충분히 느끼도록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나는 쓰면서 내게 묻고 있었다. ‘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어?’라는 원초적인 물음도 있었고,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도 있었다. 어떻게 나 자신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였다.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것이 돈인지 능력인지, 명예인지 무엇이 삶의 가치를 안겨다 주는 것인지 알지 못했을 때 그저 나는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왜 웃었는지, 왜 눈물을 흘렸는지 쓸 뿐이었다. 그것이 나를 느끼고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유일한 신호였다. 그것이 내게 있는 능력이었을까. 아니 없다면 개발해야 했다.      

나는 내게 말을 걸어야 했고, 나는 나를 위로하여야 했으며, 나의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오래전에 심리 상담센터를 찾은 적이 있다.  몸의 통증은 사람 자체를 피하게도 만들었기에 나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찾고 싶었다. 내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는 것에 한계를 인정하는 지점이 되기도 하였다. 내담자가 되어 그곳을 찾았을 때 내 안에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담자는 50이 채 안된 남자였다. 그는 내게 무슨 일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냐고 물었다. 왜 이혼을 했는지도 물었다. 왜 이혼을 처음에 참았는지도 물었다.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 그가 “박주하 씨!”하고 소리를 질렀으니까. 나의 인내심이 나를 망가뜨렸다는 직설적인 말도 하였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내게 말했다.

“바보예요? 당신 상처가 중요하지 그런 이유로 고통을 참아요? 왜 그리 미련하죠? 누가 당신에게 그런 것을 참으라고 했나요? 내가 대신 그 사람 욕을 해줄게요. 아니, 날 따라 하세요.”

나는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또박또박 그의 말을 따라 하면서 단 한 번도 내뱉어 본 적이 없는 단어를 내 귀로 들었다. 속이 시원해야 했다. 허탈하기만 했다. 뒤늦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허무함이 몰려오기도 했다. 그는 내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억압하여 심리적 문제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나의 사고방식도 내 문제를 증폭시켰다고 조언했다. 그 뒤로 몇 차례 기억하기 싫은 장면,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상처를 재연하였는데 그 대상은 커다란 아이보리색의 포근한 곰인형이었다. 나는 말없이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 곰인형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몇 마디 내뱉었다. 촉촉한 검은 눈빛을 반짝이는 곰은 무슨 죄인가.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아랫입술이 떨리니 상담자를 찾아왔던 최초의 목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는 멈췄던 글로 돌아왔다. 솔직히 말하면 상담자와 대화를 할 때는 글 쓸 힘을 잃어버렸다. 그와의 한 시간 남짓한 대화는 맥을 못 추도록 하였고 나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엉키기도 하였다. 과소비된 감정이 문제였다. 소비되는 감정이 내게 힘을 주지 못하였다.

상담센터 가는 것을 멈추고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쓰고 나면 마음에 바람이 들어왔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창문을 열었다. 곳곳에 쌓인 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걸레를 손에 들고 먼지를 닦았다. 인형과 양초, 액자 등 놓인 자리를 바꿔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종이와 펜도 앞에 두었다. 글쓰기는 내 마음 문을 열게 하였고 나 스스로를 감싸도록 하였다. 상담자와 얘기할 때는 정말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도 되는지 나는 걱정하였다. 글은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내게 소리치지도 않았고, 내게 그때 왜 그렇게 했냐고 되묻지도 않았다. 그저 나의 마음을 들어주기만 하니 평온해진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글을 쓰며 삶을 끌어안기 시작했다. 멈추었던 글에 다시 속도가 붙었다. 그저 최대한 나를 쓰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심리적 해방감이다.


내가 겪어온 삶을 연기처럼 날려버리지 않고 쓰는 행위가 내게 어떤 것을 해줄지는 그 당시에 알지 못했다. 단지 하루를 견딜힘을 내게 주고 있다는 느낌만 분명하게 자각하였기에 순간 떠오르는 어떤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쓸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사진이라도 남겨두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흔적을 남겨두었다.

나는 인생을 달리기 하듯 숨이 차도록 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천천히, 느릿느릿하여도 멈추지 않고 내가 선택한 삶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우기를 바랐다. 중단된 글을 다시 보니 나는 여전히 삶을 희망하고 있었다. 다시 시작한 글에서 삶을 두려워하는 나를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삼십 대를 글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터널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왔다.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종이라고 하겠다. 그가 가진 공간의 여백은 모든 것을 담아주기에 나는 삶에서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없다.

나는 말한다. 종이 위에서만큼은 나를 제한하지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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