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공부방 - 아이에게서 삶을 배웁니다.
공부를 왜 하냐는 질문에 나를 알고 타인에게 공감하며 이로운 영향을 타인에게 줄 수 있도록 힘을 키우는 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아이들의 다양한 문제와 상황을 깨닫지 못했다면 여전히 나는 입시에 갇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를 돌아봤다. 즐겁게 공부하는 선생님과 아이들을 상상하며 행복한 공부방을 기대하였다. 나름대로 아이를 잘 파악하고 위기 대처 능력도 있었지만 나 역시 시험 점수에는 자유롭지 못했다. 영어 잘하는 아이, 시험 잘 보는 아이를 만들기 위해 시험문제를 풀렸다. 시험기간에는 문제 푸는 기계를 만들었다. 무작정 그렇게 해야 했다. 높은 시험 점수가 과외 선생님 역할을 잘하는 증거가 되기도 하니 성적 관리를 잘해야 했다. 대부분 사교육을 시키는 이유는 학교에서 성적을 잘 받도록 위함이 아니었던가. 부모가 원하는 것도 좋은 성적이었으니 그 목적에만 부합하면 된다고 여겼다.
시험이 끝났으니 평상시 수업 분위기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 시험이 끝난 후 범위에 있던 문법 한 꼭지를 선택해 설명을 해보라고 했다.
“설명이요? 갑자기 설명을 왜 해요? 시험 다 맞았으면 됐지.”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설명은 미흡했다. 성적이 낮은 아이는 자신감이 없어 더 설명하는 것에 쭈뼛거렸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백점 맞으면 뭐하나 싶은 회의감이 들었고, 내가 가르치는 목적을 시험으로 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이들의 능동적인 공부에 대해 고민하였지만 쉽게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수업 방식에 대해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즈음 신규 상담 전화가 왔다. 여느 때와 똑같이 아이가 보는 문제집을 다 살피며 아이에게 질문을 했다. 공부한 흔적이 있는 독해 문제집 어느 장을 펴서 읽어보라고 하고, 해석과 지문을 설명을 해보라고 했다. 지문을 읽었지만 해석은 정확하지 않았다. 문제는 대부분 동그라미로 되어 있는데 답이 왜 그런지 설명해보라고 하니 모르겠다며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아이는 꽤 성적이 좋은 아이였다.
“공부하는 거 어때? 고민이나 힘든 점이 뭔지 말해 줄 수 있어?”
“발표요. 설명을 잘 못하겠어요. 시험은 잘 보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는 그때 수업 방식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에게 공부의 목적을 넓게 생각하라고 한 것처럼 나도 가르치는 방식을 바꿔야 했다.
기존의 수업방식은 단순하였다. 책의 내용을 설명한 후 문제를 풀면 숙제는 해석을 포함, 남은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한 단원이 끝나면 단원평가였고, 90점 이하면 재시험이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설명을 잘해주고 대화가 잘 통하는 선생님이었지만 수업방식은 보통의 선생님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시험만 끝나면 거짓말처럼 내용을 잊어버리는 아이들, 배웠음에도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그 내용이 새로워지는 현상도 내 책임 같아 오류를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빠른 진도에 욕심을 비웠다. 느려도 정확하게, 그리고 스스로 설명이 가능하도록 공부의 단계를 세분화하였다.
가르친 후 숙제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우선 배울 내용을 먼저 노트 정리하도록 한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필기를 잘하지 않는다. 학교든 학원이든 설명이 되어 있는 프린트로 공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자료 정리를 잘하는 아이들은 프린트 보관도 잘하고 꼼꼼하게 배운 내용을 따로 정리하기도 하지만 그 비율은 낮았다. 한번씩 가방을 열어보면 구겨진 프린트 등이 쌓여있고. 책 사이에 끼워진 프린트도 막상 꺼내보면 공부한 흔적은 없었다.
아이들에게 프린트 주는 횟수를 줄였다. 문법 노트와 리딩 노트, 바인더를 만들어 자료 보관함을 만들고 체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수업 전에 배울 내용을 알려주고 개념 정리 숙제를 내주고, 모르는 것들을 사전 체크하게 하였다. 노트 정리 숙제를 내주니 질문이 전보다 많아졌다.
문제를 푼 후 답의 이유를 서로 설명하게 하여 단순히 채점하고 틀린 것만 체크하는 수준에서 벗어났다. 물론 시간은 두 배로 더 걸렸다. 계속 설명하라고 하니 아이들도 처음엔 힘들어했다. 반복할수록 조금씩 나아졌다. 무엇보다 문제를 빨리 푸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다 풀 때까지 딴짓을 하며 시간을 때웠는데, 설명하도록 하니 문제를 풀고 나서도 답의 근거를 찾기 위해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찾았다. 양보다 질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 단원이 끝나면 리뷰 테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과 같으면 그 시험은 공부의 끝이었다. 시험을 과정으로 하고,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 전체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였다.
아이들은 다시 배운 내용을 정리하고 발표할 자료를 만들었다. 자료는 간결해야 했고, 키워드와 예문으로 설명해야 했다. 시험은 공부의 목적에서 과정으로 둔갑되고, 잘 말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했다.
수업의 단계를 세분화하고, 과제를 바꾸니 아이들의 공부하는 태도와 말하는 표현 방식, 공부 시간 등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문법 문제를 풀고, 해석을 하는 단순한 시험공부를 할 때는 빨리하는 것만이 목표였다. 대충 풀기도 하고 맞은 것은 두 번 세 번 보기도 힘들었다. 시험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나선 숙제는 빨리 끝날 수 없었다. 제대로 설명이 되는지 스스로 말을 해봐야 했고, 한 번 설명을 하는 것으로 완성되지도 않으니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공부하는 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표현이 잘 안 되는 것을 자각하고 부족한 점을 알게 되니 자만하던 아이들도 더 이상 큰소리치지 않았다. 성적이 낮은 아이들은 반복해서 설명하는 연습을 스스로 하게 되니 내용을 정확히 알게 되어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구별이 불분명하였다. 문제를 틀리면 모르는 것, 맞으면 아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답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내가 알고 모름의 판단 근거가 되었다.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 할 것 없이 하나하나 설명하도록 하는 과정은 지루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공부의 속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시험 기간이 되면 효율성은 그 전보다 더 올라갔다. 문제 푸는 양이 절반으로 줄었으며 스스로 설명 가능한 상황에 이르자 시험공부도 스스로 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각자 취약한 부분을 골라서 문제를 선택하였고 분량도 각자 정했다. 시험 기간에 조용히 입 다물고 문제만 풀었던 이전과는 달리 아이들은 떠들면서 문제를 풀고 내용을 정리하였다. 더 이상 조요한 공부는 하지 않는다.
시험 결과는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으며, 학교에서도 발표 잘하는 아이로 거듭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