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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한채 Jan 03. 2021

할머니는 라면이 밉다.

우리 할머니한테 머라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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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삼천포. 응답하라에 나왔던 그 삼천포가 내 시골이다. 달리 말하면 부모님의 고향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삼천포 출신이다. 동네 친구로 만나서 결혼까지 하신 두 분의 이야기는 각각 다르다.     

 

-너희 아빠 다리 떠는 것 때문에 안 만난다고 했는데, 서울까지 따라와서 매달렸다.

(by, 엄마)     


-아빠 만날라고 여자들이 시골집 대문 앞에서부터 줄 서 있었다. 그중에 엄마를 고른 거지

(by. 아빠)     


사실, 그동안 생활을 통해 짐작컨대 어머니 말에 더 신빙성이 있다.. 지금 우리가 서울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서울 생활만 30년이 넘어가고 있다. 매년 명절 때마다 삼천포를 내려가는 전쟁?! 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고속도로가 잘 깔리기 전에는 큰 지도를 이용해 국도를 타고 시골로 내려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렸을 적 4살까지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래서 매년 진짜 엄마가 와서 나를 반겨주면 나는 할머니 뒤에 숨어버렸다.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고 머리가 큰 뒤에 말씀하셨다.) 그래서 매년 시골 내려가 할머니 얼굴 보는 재미가 너무 좋았다. 모두가 다른 사람 편을 들 때 할머니는 내 편을 들어주셨다.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말만 하면 다 해주셨다.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할머니를 나는 잘 따랐다.     


그러던 어느 명절날. 엄마가 할머니에게 한 말씀하셨다. 몇십 년 동안 서울에서 시골 내려왔을 때 따뜻한 밥 한번 해주지 않으셨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손주들하고 큰 아들 오는데 밥솥에 밥도 없고, 먹을만한 반찬도 없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사실 이 내용은 서울에서 우리 가족끼리 있을 때 몇 번 나왔던 이야기다. 속앓이만 하셨는데 저 때 터져버린 것이다. 그 뒤엔 별 말없이 대화가 끝나지만, (사실 엄마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끝나기는 했다.) 할머니는 끝까지 묵묵부답하셨다.(사실 귀가 이제 잘 안 들리시고, 눈도 잘 안보이신다.) 하지만 알아채셨을 것이다.     


그러고는 시간이 꽤 흘러 2020년 가을쯤에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코로나와 강아지들로 인해 동생과 내가 동시에 할머니를 뵌 적이 없어서, 큰 맘먹고 휴가를 내서 다녀오기로 했다. 할머니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재롱도 피고 올라오는 계획이었다.


저녁 버스라서 밤늦게 도착했다. 시골은 9시부터 취침모드라 밤 11시 도착은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당연히 저녁도 못 먹고 출발한 우리는 할머니 댁에 가서 먹을 라면을 사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 할머니!

- 옹냐! 어서 오이라~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시는 할머니에게 큰 절 올리고 안부를 여쭤봤다. 잘 살고 있냐는 등의 안부인사를 나누다가 할머니께서 물으셨다.     


- 저녁은 먹었나?

- 아니, 안 먹고 와서 라면 사 왔어!     


검은 비닐봉지에 무질서하게 쌓인 컵라면을 들어서 보여드렸다. 그러고선 할머니께 여쭤봤다.     


- 할머니는 먹었어?     


그러자,


-너네 오려면 같이 먹으려고 안 먹었지.      


그러시고는 주방에 들어가셨다. 찌개를 끓이시고 밥솥에서 밥을 꺼내시더니 곧이어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소갈비, 갈치조림, 장어국 등 평소 손주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졌다.     


-와~ 할미가 손주들 밥 안 챙겨줄까 봐 라면 사 왔나     


그렇게 우리 셋은 늦은 저녁을 함께 했다. 평소 이른 시간에 드시는 할머니께서 늦은 시간까지 굶고 계셨다는 생각에 죄송했다. 얼마나 허기지셨을까 생각하니 호기롭게 내민 검은 비닐봉지가 눈에 밟혔다.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할머니와 함께 했다. 우리 아니면 잘 드시지 않는 피자도 사드리고, 치킨도 사드리고, 소고기도 사드렸다. 어린아이처럼 잘 드셔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할머니와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서울로 올라왔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짐을 들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식탁 위에 올려진 검은 비닐봉지가 보였다. 3일 전 사온 그 모습 그 형태 그대로 어느 누구도 손을 대지 않은 그 상태로 놓여 있었다.      


- 할머니! 라면 내가 가져갈게 올라가서 먹어야지

- 옹냐 알았다. 어여 들어가고 건강 챙기고~

- 알겠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또 올게요     


그렇게 동생과 나는 라면을 챙겨서 서울로 올라왔다. 할머니와 있었던 이야기를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삼촌과 고모의 안부도 전달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저녁 이야기를 해드렸다.     


- 할머니가 우리랑 밥 같이 먹으려고 굶고 계셨어. 갈치랑 장어국이랑 갈비랑 많이 해놓으셨더라.

- 그래? 몇십 년 만에 처음 본다. 큰 아들은 서울 올라온 이래 엄마 밥도 못 먹었는데 손주들은 챙기셨네.     


엄마는 몇십 년 동안 많이 서운하셨나 보다. 어렵다. 참으로. 엄마의 입장도 이해되고 할머니 입장도 이해된다. 그럼 난 어느 쪽에 있어야 하는가. 중립국을 외쳐야 하는가 싶다. 그러다 엄마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두 팔로 엄마 어깨를 감싸며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 우리 할머니한테 머라 하지 마.. 할머니도 좋고 엄마도 좋아     


할머니는 라면이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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