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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AN Aug 10. 2020

나에게 갈비란

수필

기억의 범위는 자기 마음대로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할 만큼 먼 옛날의 일이라도 때때로 머릿속의 뇌는 불현듯 그때의 기억을 반추하게 만든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요는 기억이란 참으로 영특하고 인간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들 중에서도 특히나 강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대개 그런 추억들은 특별한 일이나 사물에 연관되어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음식의 경우, 그러니까 오감 중에서도 미각을 일깨우는 기억이 더 머릿속에 남을 때가 많았다.



수필을 쓰는 방법에는 정해진 형태가 없다. 문학의 여타 갈래와는 다르게 비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으로 하여금 추억을 돌이켜 볼 것이다. 음식을 통한 수필, 그렇다면 가장 처음에 해야 할 일은 추억을 갖고 있는 음식을 정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많은 고민을 하였다. 추억으로 삼을 만한 음식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아빠가 어릴때부터 입맛이 없다고 하면 해주시던 볶음밥, 엄마가 가끔 해주시던 참치미역국, 할머니의 비빔국수...이런 식으로 내 인생의 8할 정도를 그렇게 돌아보고 있을 즈음에 한 가지 음식이 내 의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갈비였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정신적인 갈비를 씹겠다. 흘러나오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육즙은 너무나도 달콤할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5살 때 고향 부산에서 남쪽인 삼천포로 내려오셨다. 아빠가ㅡ용법상으로는 아버지가 맞는 표현이겠으나 이것은 내 추억의 발로로써 쓰이는 글이기 때문에 아빠라는 표현으로 적겠다. 예나 지금이나 필자에게 아빠는 아빠이기에.ㅡ원래 하시던 호텔 요리사를 그만두시고 삼천포에 작은 오징어 공장을 운영하시기로 했기 때문이다. 공장의 덕장에 꿰인 희연 빛깔의 오징어들과 초록 옷을 입은 인부들이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도 활력을 느끼게 만들었다. 학교가 끝나고 합기도 도장을 다녀오면 해는 서쪽 끝에 걸려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는데, 그 때 즈음에 공장 부지 전체를 뒤덮는 밝은 조명들은 알게 모르게 내 기분을 고양시켜 주었다.



작은 공장이었기에 식사도 인부들과 같이 했었다. 근처 음식점에서 시킨 돈까스나 돼지국밥, 쌈밥들이 식사의 주를 이뤘다. 그것들도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음식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빠 친구가 하시는 고깃집에서 구워먹는 갈비였다. 낡은 갈색 간판에 칠이 벗겨진 벽면에 테이블도 몇 개 없는 작은 건물이었다. 그런 곳에 열댓명이 들어와서 붐볐던 풍경과 그 모습을 난처함 반 기쁨 반의 얼굴로 보던 아빠 친구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빠는 고기를 참 잘 구우셨다. 본래 요리사 출신이셨기 때문에 고기를 굽는다는 행위, 그러니까 조리라는 행위 자체에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 공장일로 거칠어진 굵은 손은 갈비를 능란하게 구워내었고 나는 그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2주일에 한 번씩은 들렀던 가게였기 때문에 매달 어느 요일이 되면 나는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저녁시간엔 미리 그 가게에 가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이 완벽했다면 소설이나 영화같은 것들은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수긍하다 못해 연신 고개가 빠질 정도로 끄덕일 진실이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시기에 아빠의 공장은 개업할 때 낸 빚을 다 갚고 이제야 흑자를 낸다 싶은 참에 문을 닫게 되었다. 보이스피싱 사기에 속아버린 것이다. 어린 나는 그때의 정확한 인과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공장이 망했다' 는 단순한 충격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빚이 몇억원대로 불은 상황이었다. 부모님은 몇달을 상의한 끝에 수산시장 근처에 있는 작은 집에 건어물 가게를 차리는 것으로 생활의 노선을 돌렸다. 수입은 공장보다 줄겠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공장을 더는 운영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아빠와 엄마는 웃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일은 며칠을 건너 허다하게 일어났고 사춘기에 접어든 난 반항을 하지는 않았지만 방황했다. 6살 차이나는 남동생은 어린 마음을 일찍이 닫았고 부모님은 그 사실조차도 모른채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빈 말로도 좋은 나날이었다고는 못하겠지만 좋은 기억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 갈비다. 아빠는 공장으로 겪은 실패를 내가 어른이 된 지금도 후회하고 계신다. 하물며 내가 중학생이던 당시에는 어땠겠는가. 속으로는 울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가족들을, 더이상 함께 웃고 지낼 수 없는 과거를 함께 데리고 그 고깃집에 가셨으리라 감히 짐작해본다. 아빠 친구께선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일 정도로 나이를 잡수신 상태였지만 고기 맛은 변함이 없었다. 아빠는 묵묵히 고기를 구워주셨다. 말수는 적어지셨고 표정에는 전보다 근심이 확연하게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웃는 얼굴로 '정우야 마니 묵으라' 하셨다. 그것은 진정으로 기뻐할 때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엄마도 그 모습을 보며 옅게 미소를 지으셨다. 고깃집에 가는 횟수는 줄었지만 우리 가족의 사이는 그 적은 횟수의 식사로 인해 가까스로나마 유지될 수 있었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 어느덧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좋은 소식이었다. 굵직한 것들만 뽑아보자면 가게의 수입이 안정권으로 들어섰다는 사실과 그에 따른 집안의 평화, 그리고 병상에 누워 계시던 할머니가 요양 차원으로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늘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엄마가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이 찾아온 것이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학교를 일주일동안 쉬면서 엄마를 간병해 드렸다. 한창 입시준비로 바쁠 시기였지만 뭐가 더 중요한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엄마와 같이 보내는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 내 행동의 이유로는 충분했다. 엄마가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퇴원하던 날. 우리 가족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그 고깃집에 갔다. 특별히 맛이 좋은 것도 아닌, 어느 지역을 가도 한두군데는 있을 법한 그런 곳이었지만, 거기에서 보내는 우리들의 시간은 더 없이 소중했다. 아빠는 여전한 솜씨로 고기를 구우셨다. 어려운 시기를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이셨다. 엄마는 퇴원한 직후였기 때문에 많이 드시진 못했지만 아빠만큼이나 행복한 얼굴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때 먹은 갈비는 어딘가 짠맛이 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에 간 건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졸업장을 받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피시방과 노래방에서 진탕 놀았다. 저녁을 먹기에는 늦은 시간인 9시가 되자 친구들은 다음에 보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와 가장 친한 친구 2명이 우리끼리 어디가서 밥이나 먹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친구들을 거기로 데려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서 여기는 나한테 소중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자세한 얘기까지 꺼내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속을 터놓은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고기를 구우면서 장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1년 뒤, 5년 뒤의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나였지만 걱정 없을거라며 두둔해주는 친구들의 말에 적지않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문득 친구 중 한명이 고기가 참 맛있다고 했다. 나머지 한명은 정우가 잘 굽는거라면서 날 치켜세웠다. 나는 먹기나 하라며 웃어넘겼다.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항상 걷는 길이었음에도 그 날은 뭔가 달랐다. 사실 아까 웃어넘겼을 때 울컥한 감정이 아직 속에 남아있는 탓이었다. 아까 고기를 잘굽는다고 친구가 말했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보았다. 집게를 쥔 손에는 굳은 살이 켜켜히 박혀있었다. 아빠의 손처럼 말이다. 그래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일부러 웃어넘겼다.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약해질지언정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 부모님에게도 감사했다. 그렇게 시련을 이겨낸 우리 가족이 너무나,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청승맞게 길거리에서 눈물을 글썽인 나는, 그 날밤 한참을 서성이다 집에 들어갔다.





갈비에 대한 나의 추억은 대략 이렇다. 이렇게 먼 타지에서 글을 끄적이니 확실히 없던 애향심도 솟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처음 이 글을 쓰려고 했을 때 떠오른 책이 한 권 있었다. 바로 황석영 작가의 맛의 추억이다. 이 책은 황석영 작가 본인이 자신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는 맛의 기억에 얽힌 애틋한 추억들을 풀어낸 내용을 담고 있다. 음식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맛의 추억은 이 글과 닮았다. 아직 20년도 차지 않은 나의 추억은 그와 비교해보면 얄팍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가장 소중한 추억들을 글에 담았다. 무릇 수필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시간을 비롯한 세월은 채우고 싶어도 채울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나도 60이 가까운 나이가 되면 황석영 작가처럼 깊은 글을 쓰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많은 수필이 주로 쓰는 방법인 '다음에 고향에 내려가면 그 곳에 한번 가야겠다' 라는 식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를 할 수 있으면 좋았겠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다. 그 고깃집은 몇달전에 폐업했기 때문이다. 아빠 친구 분의 건강이 악화되어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그런 의미에서 갈비는 진정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다시는 맛볼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갈비는 우리 가족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해준 아주 고마운 음식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빠가 아빠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음식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다른 고깃집의 갈비를 보면 그 고깃집의 모습을 비춰보고는 한다. 짙은 갈색의 양념에 잠겨서 유들유들해진 고기와 갈빗대. 서서히 익어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 시절의 향수가 느껴진다. 먼 훗날, 나에게 책임져야 하는 가정이 생긴다면 그때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갈비를 먹으러 가고 싶다. 빨리 고기가 익기를 바라는 자식들에게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구워주고 싶다.



아빠보다는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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