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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Nov 27. 2019

(핀란드 일지) Finland - Tampere

그들이 행복한 계절




2019.07.15


드디어 찾았다, 둥글둥글 현미!

다리 건너서 유기농 식품점과 Sokos 백화점의 식품관에서 그리운 녀석들을 찾았다.

베트남, 폴란드, 에스토니아에서는 찾지 못했던 둥글한 현미를!!!

혹시 이 녀석도 살랑살랑 날릴까 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불리고  밥을 지어 주걱으로 저으니

침 고이는 익숙한 찰기가  느껴진다.

지저분하게 주걱과 솥에 달팽이처럼 끈적한 흔적을 남긴다. 그 녀석이 맞다.

쌀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스러운 식사를 한다.

현미가 이렇게 찰기가 있는 녀석이었다니...

무슨 찹쌀이라도 되는 양 쫀쫀하고 꼬득한 식감! 

맨 밥을 입안에 넣고 계속 음미한 식사시간.

이제 일단 핀란드에서는 밥 걱정 없겠다.


요 며칠 해가 쨍쨍이다.

워낙 우중충한 날들이어서 나는 좋지만 이곳 사람들은 참 지치겠다. 싶었는데

웬일로 며칠째 나는 괴롭고, 이들이 좋아하는 쨍쨍한 날씨이다.

무작정 지도도 보지 않고 걸어 다니지만

이런 도심에 있다 보면 매일 지도를 보고 갈만한 녹지나 물이 있는지 찾아보게 된다.

호수와 숲의 나라인데 모두 차로만 다닐 수 있는 국립공원, 숲, 호수라서

뚜벅이는 아직 작은 공원의 웅덩이 밖에 보지 못했다.

큰 나무들과 물이 고프다.

지도를 찾아보니 걸어서 30~40분 거리에 뭔가 큰 웅덩이 그림이 보인다.

이름만 있고, 어떤 설명도, 인터넷에 찾아보니 리뷰 같은 것도 없는 웅덩이.

오늘은 그 웅덩이를 향해 걸을 예정이다.


쨍한 날씨의 시장은 어떤 가 싶어 집 앞 Tammelantori에 먼저 들르니

이른 시간부터 북적북적.

문도 열지 않았던 간이식당들이 활짝 열려있고, 

역시나 아이스크림 가게 앞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줄 서서 아이스크림을 기다리고,

흐린 날 텅텅 비어있던 나무 벤치는 중고 물품을 주르륵 늘어놓은 사람들고 메워졌다.

어디서 깽깽 좋지 않은 음악 소리가 들려 가보니

어리고 길쭉한 소녀가 악보를 살펴보는 엄마 앞에 서서 바이올린을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끽끽 연주 중이고

지금 막 자리를 잡은 듯한 파릇한 소년이 수줍게 바순을 세팅한다.

사람이 많으니 참새, 갈매기, 까마귀도 덩달아 배가 불러지는,

탐페레 사람들이 모두 여기 모여 각자 다른 소리로 즐기는 동네 오케스트라 같다.


여태까지 탐페레 사람들은 한국사람들(한국 사람들이 아웃도어 용품을 하도 입고 다녀서 외국인들이 보면

산악인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처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운동복 차림이라 패션 풍경이 낯설지 않았는데

이 사람들 얼마나 멋부리고 싶었을까! 싶을 만큼

날이 화창하니 온갖 화려한 패션들, 많은 웃음소리, 많은 사람들로 거리가 반짝인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였구나. 이제서야 실감이 난다. 

모두 잔디밭에 드러눕고, 혼자, 또 같이 앉아 그냥 이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

비 러버 이방인은 이 날씨가 힘들지만 이들의 행복이 고스란히 눈에 담기고, 마음에 담겨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기들은 자기가 힘들 때보다 가까이 있는 다른 아기가 힘들어 울면 덩달아 너도나도 운다고 한다.

아주 타고난, 동물이 가진 공감 능력인데

몸이 훌쩍 커버린 성인이라는 부류도 내가 괴로워도 행복한 존재를 보면 그 행복을 전달받는 것 같다.


하드코어의 고장이라는 증거를 만나고, 무민도 만나고, 

갇히지 않고 고스란히 흙 속에서 행복해 보이는 나무도 만나고,

점점 걸으니 큰 도로도 나오고, 공동묘지도 나오고 인적이 끊긴 곳으로 접어든다.

도로를 지나는 건 내게 무척 힘든 일이지만 묘지 밖에 이어진 작은 숲으로 위로를 받고

그 길을 지나 또 도로를 만나면 그다음 또 공원과 나무를 만날 수 있으니

걷는 길이 인생길같이 변화무쌍하고 힘들지만 걸을 만한다.

저 위의 호수로부터 길에 이어져 온 좁은 여울이 보이고 

와! 하는 찰나에 눈을 돌려보니 점점 너비가 넓어지고 뻥 뚫린 호수가 보인다.

꼭 맹그로브 숲처럼  이곳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둬서 나무만큼 큰 이름 모를 다양한 풀들과

건강해 보이는 흙과, 꾸벅 졸고  사냥을 하는 오리들과, 하늘과 구름, 바람!

생일잔치를 해주는 것 마냥 한 자연이 눈앞에 떡 차려져 있다.

그냥 멈춰 설 수밖에 없는 풍경.

볼 수 있고, 맡을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음이 완전한 행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물 곁으로 가까이 걸을 수는 없게 정글 같은 공간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한참 걷다 보니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작은 길이 만들어져 있어서 들어가 보니

정말 한 발만 잘못 시도하면 물이 빠지게 되는 있는 그대로의 작은 흙길이다.

사람의 흔적일랑 찾아볼 수 없는 길이라 날 친구들도 많다.

토미는 사실 이런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되지만 조금 걸어보고 싶다 하여

정글 같은 길을 구부정하게 걸어본다.

어릴 적 매일 산과 숲을 누비던 나도 몸이 큰 사람이 되고, 

도시의 시멘트 상자에  너무 오랜 세월을 갇혀 보내서 그런지 자연스러운 이 촉감들이 가물하고 

조금 두렵게 다가오기도 한다.

결국 얼굴이 파랗게 질린 토미를 데리고 다시 만들어진 길 가로 나온다.

놀랐나 보다. 맨 흙과, 너무 가까운 그대로의 호수와 몸이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풀숲과, 

사정없이 달려드는 날 친구들이 토미에겐 더 낯설기 때문이다.

자기 때문에 빨리 나온 것이 미안한지 호수의 둘레가 얼마가 되던지 꼭 한 바퀴를 돌자고 한다.

괜찮아 토미.

나도 오늘은 충분해.


산을 만나면 꼭 정상까지, 누구보다 먼저 닿아야 직성이 풀리고

시작한 길을 절대 쉬지 않고 악착같이 걸어내던 나.

지기 싫어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마음이 늘 해내야 하고, 누구보다 먼저, 제일이어야 하고,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 힘들고 가여운 마음을 가졌던 나.

나약해진 것이 아닌가 싶었던 적도 있지만

나약해졌으면 어떻고, 그런 마음이 약해지고, 그랬으면 어떤가.

지금 함께한 동행과 이렇게 온몸으로 자연을 마주했으면 됐고

다 돌지 않아도 충분히 순간순간 전율이 느껴지게 행복했으면 됐다.

내일 또 쨍한 해에, 조바심 나는 일과와 소란스러운 마음에 잠시 먹힐지라도

오늘 충분히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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