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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Dec 08. 2020

(Ohrid)
먹고, 걷고, 보기 좋은 날

마케도니아 일지







2019.10.06


비와 어둠이라는 것이 사라진 도시처럼 타는 듯 쨍쨍하기만 하던 오흐리드.

며칠 전부터 갑자기 추워지고, 우중충한 날이 잦아지더니 1주일 사이에 

여기저기 깨벗은 무리들이 자취를 감춘 요즘.  산책하기 참 좋다.

물 가까운 곁으로 걷고 싶어도 모두 깨벗은 무리들의 서식지라 호수 곁으로 산책하는 것이 불가능했었는데

오흐리드 생활 두 달째에 접어들고서야 중간 막힘없이 호수와 나란히 걷고 그대로의 호수를 바라볼 수 있다.

처음으로 호숫가의 나무의자에도 앉아 멍하니 호수와 수초들, 그 위에서 쉬고 있는 새들을 바라보고 

입 찢어질 듯한 미소를 머금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른 아침이나 저녁 산책만 하다가 요 며칠은 매일 낮에도 나다니다 보니 

게으름뱅이가 오늘 하루는 씻기도 귀찮아 그냥 집에 있고프다.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반복하는 같은 일과는 블라인드를 열고 하늘색과 구름, 바람을 살피는 일,  

아파트 단지 터줏대감 멍돌이 두 녀석을 찾는 일, 그리고 동네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인데 

또 밖을 보니 날이 미치도록 좋고, 날이 좋으니 술을 사 오고파서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나선다.

이제 겨울 외투를 입어야 하나 싶은 날씨인데 이런 날씨가 되니 사람이 드물어서 좋다.

올드타운을 거쳐 까네오 산책길로 꺾으려는데 어라. 많은 멍돌이들 중 눈에 익은 녀석!

지난번 스베티 나움을 다녀와서 호숫가 식당에서 외식할 때 만나  동행한 멍돌이가 드러누워있더니

우리를 보고 벌떡 일어나 따라온다.

와. 이게 무슨 인연이야 멍돌아!

이 녀석도 산책하려나 보다. 싶은데 예전 우리 검둥 똥개 짜빠리가 그랬듯이 

곁을 걷다가 앞질러 가게 되면 뒤를 돌아 나를 살피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걷는다.

오늘 너를 만나려고 내가 술이 고팠나 봐!

조금 걷다 돌아가겠다 싶은데 꼭대기 우리의 산책로 숲길까지 내내 내 곁에서 함께다.

다른 사람들이 와도 내 곁에서만 걷는 멍돌이.

오늘도 모두 내 개인 줄 아는 내 껌딱지 멍돌이.

긴 산책길 끝을 찍고 다시 올드타운으로 내려와서야 각자 갈 길을 간다.

행복하다. 

오흐리드에 다시 온다면 나는 오흐리드 멍돌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일 것이다.


내려와 마트에서 과일, 채소, 술, 그리고 토미 특식을 산다.

오흐리드에 와서는 두 번의 마트 조리 고기를 먹고 먹지 않는 토미.

그래서인지 별로 권하고 싶지 않지만 안쓰러워 대안이 될 수 있는 마요, 비건 파테, 후무스 등을 찾아내어 권해주니

달랏, 바르샤바, 탈린, 탐페레, 헬싱키에서도 안 먹겠다더니 이번엔 바로 덥석.

엄청난 느끼쟁이에 '마요라'인 토미는 그것들이 다행히 좋은 대안이 되는 것 같다.

내가 한 번도 권한 적도, 강요한 적도 없지만 스스로 그렇게 늘 하고자 하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토미가 좋아하는 또 다른 대안 음식을 찾아서 권해보는 정도다.

그래서 매일 장바구니에 넣어 들어오는 파테, 마요, 후무스.


집 앞에 도착하니 단지의 다른 터줏대감이자 매일 참으로 도도하고 시크한 냥돌이가 

업어가도 모를 듯이 퍼질러 단잠을 자고 있다.

오늘 어쩐지 나오고 싶더라니. 

하하하

돌아오니 막상 술보다는 밥과 얼큰한 반찬이 당겨 오이김치와 호박, 버섯볶음, 감자 간장 볶음, 

그리고 나중엔 오이 얼큰 국까지 끓여 한바탕 배부르게 밥을 먹고 테라스 자리로 나가 술을 딴다.

오랜만에 운해가 잔뜩 머물고 있는 풍경을 보며, 구름이 시시각각  빠르게 그려내는 신비로운 그림을 보며, 

하늘색이 파랗고 빨갛게 물들며 영혼까지 깊게 물들이는 절경을 바라보며 오래오래 그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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