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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Nov 29. 2020

(Ohrid)
우중충한 날은 온전히 우리 세상

마케도니아 일지







2019.10.04


잠 못 드는 새벽.

잠은 못 자도 빗소리가 기분 좋아 푹 잔 기분으로 개운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드디어 비가 오는구나.


오늘은 비가 오면 스베티 나움, 세인트 나움에 가기로 했다.

나움에 가는 방법을 알아보니 페리와, 택시, 버스가 있다고 한다.

매일 다니는 호숫가 산책로에서 봐 둔 페리 시간은 오늘은 10시가 첫 배인 듯하고 매일 다른 듯하다.

비수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다.

토미가 페리를 꼭 타고 싶어 해서 시간을 봐 두긴 했지만, 물론 나도 물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얼마나 멋질지 궁금하지만 타고 싶지 않다.

이미 비행기와 핀란드 탈린에서의 대형 페리로 자연에 많은 것들을 배출한 우리다.

토미의 일 마무리가 늦어지는데 페리 생각만 하고 있는 토미는 조바심이 난 듯 시간 체크를 한다.

이미 페리 생각이 없이 버스를 타야겠다. 생각한 나는 늦어지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나갈 채비를 하고 버스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넌지시 버스를 권하니 토미도 흔쾌히 동의한다.

바나나를 싸 들고 버스 타자꾸나 토미.


우중충한 날씨에 한껏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나움 행 버스는  없다고 여기저기서 타라며 정확한 주소 없이 손짓으로만 알려주는데 

터미널 주변을 사방으로 돌아다녀도 버스가 그려진 작은 팻말만 덜렁 있고 어디에도 어떤 표식도 없다.

정말 대중교통 이용하기 어려운 도시구나.

오호. 이러다가 나움 못 가는 수가 있겠어!

이러다가 또 매일의 산책로 돌고 장 봐와서 아침부터 한잔 걸치는 수가 있겠어!

뭐, 그것도 좋지만. 후훗.이라는 마음으로 찾아보는데 

안 되겠다.


즈드라보!

날씨 때문인지 오가는 사람도 드문데 마침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여쭤보니 유창한 영어로 

딱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눈높이로 설명해주시더니 직접 정류장까지 동행해주신다.

졸졸졸 아주머니를 따라 도착하니 매일 장을 보는 KAM 마트 앞이 바로 정류장이다.

팔라! 차오!

매일 장을 보러 다니면서도 미쳐 알아차리지 못했던 철골이 정류장이었다니.

사각의 철골과 의자와 아주머니 한 분뿐인 정류장.

혹시나 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어떤 안내도 시간표도, 행선지도 없다.

정말 물어물어서야 탈 수 있는 버스인가 보다.

아주머니가 알려주셔서 정류장에 오긴 했는데 그냥 무작정 기다려야 하나.

안 되겠다.


즈드라보!

아까 인사를 주고받은, 앉아계신 아주머니께 여쭤보니 나움행 버스가 선다고 하신다.

부드러운 눈빛의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아메리카 사람이냐고. 네? 허허허. 코리안이라고 답했다.

아~ 하시는데 모르시는 눈치였지만 아주머니의 순박함에 절로 미소가 생긴다.

나움행 차는 택시 말고 꼭 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고 하신다.

그리고 11시 30분에 버스가 올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대화는 영어를 쓰지 않으시는 아주머니의 마케도니아어와 나의 몸짓으로만 소통한 대화!

떠들썩 통화를 하는 아주머니가 정류장으로 들어와 앉으며 통화를 중단하고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는데

나움! 이러는 걸 보니 이방인들이 어딜 가는지 묻는 것 같다.

역시 유난히 이방인을 신기하게 보는 오흐리드 사람답다.

그렇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차가 서더니 아주머니와 뭔가 대화를 하는데

나움! 하는 걸 보니 우리가 어딜 가는지 또 묻는 것 같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얼마에 자기가 태워준다고 한다.

여행자들이 일반 차량도 합승하기도 하는 걸 알고 있지만 버스보다 택시, 그리고 차 자체를 질색하는 나는 

버스를 타고 싶다고, 고맙다고 거절하니 노프라블럼~ 이라며 쌩~~

아까 그 남자가 있을 때 내내 가만히 어두워 보이던 두 아주머니는 차가 떠나자마자 단체로 일어나 

잘했다며, 꼭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좋다고 그제서야 웃어 보인다.

통화를 중단하면서까지 저런 차는 타지 말라고 잘했다고!


꼬마와 아이 엄마가 정류장에 합류하며 또 아주머니와 얘기가 오가고

나움! 하는 걸 보니 또 우리가 주인공이다.

이 순수한 사람들. 모두 이 까만 머리의 이방인들이 어디 가는지 참 궁금한가 보다.

기다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혼자 나무를 보고 있는데 정류장에서 아주머니가 부르신다.

스트루가. 라고 쓰여있는 미니버스가 도착해 있는데 자기는 이 버스를 타고 간다고 잘 가라고.

나는 냉큼 달려가 검고, 두툼하고, 따뜻한 아주머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팔라, 팔라, 차오차오! 

인사를 건네고 두 아주머니와 인사를 한다.

울컥.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방인을 보호하고, 챙겨주려는 따뜻하고 뭉클하고 따뜻한 아침, 그리고 우중충한 하늘.

모든 게 완벽한 아침이다.


남은 건 꼬마와 아이 엄마와 우리.

아이는 굳은 얼굴로 내 얼굴을 보다가 내가 인사를 건네니 살짝 웃다가 연신 까꿍 놀이를 해주니

그제서야 꺄르르 자지러지게 웃으며 천사 미소를 연신 보여주다 다음 작은 버스에 엄마와 함께 오른다.

곧 11시 30분 즈음이 되니 마케도니아어로 스베티 나움이라도 쓰여있는 버스가 도착.

110 데나르씩의 요금을 내고 앞자리에 앉아 출발한다.

달랏의 버스처럼 친근한 작은 버스를 시내를 거쳐 외곽으로 빠지는데 

탑승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사람들인지 기사님과도 허물없이 이야기와 웃음을 주고받으며 전원일기의

향기를 솔솔 풍긴다.

꼭 한국 시골의 마을버스와 똑같은 모습이다.

시내를 벗어나니 버스 멀미 쟁이가 한 시간의 공포스러운 버스 탑승시간이 한시도 지루할 틈이 없이

꼬부랑길의 왼쪽엔 국립공원인 산과 운해가, 오른쪽엔 바다같이 끝도 보이지 않는 파란 호수와 

정감 가는 시골 마을의 모습이 펼쳐진다.

한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풍경은 나움으로 가는 단순한 이동길이 아니라 순간순간이 완벽한 여행길이다.

페리를 탔으면 볼 수 없었을 너무도 거대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마법 같은 길을 지나 도착한 나움.

정보도 없이 도움만으로 올라탄 버스라 내릴 때에는 기사님께 하차 시간 정보를 구하고 나움에 입장.

오흐리드 호수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과 바람이다.

마치 헬싱키에서 매일 만나던 서늘한 바다 풍경과 바람 같아 내내 그리웠던 헬싱키가 펼쳐진 듯하다.

오흐리드 시내를 떠나올 때는 서늘하니 기분 좋았던 바람이 이곳에 오니 겨울 외투가 필요할 만큼 많이 춥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전세 냈다. 싶을 만큼 사람도 없고 물론 호숫가에 깨벗은 사람도 절대 없다.

매우 유명 관광지이면서도 올드타운에 유료 화장실이 덜렁 하나 있는 오흐리드라

여기 도착해서도 방광 취약자는 초입의 유료 화장실 위치를 봐 두고 슬금슬금 걷다 보니

어라. 생각보다 나움이 상당히 작다. 듣던 대로 공작도 많다.

저녁 버스까지 오래오래 놀다가 가려고 했었는데 너무 짧은 길.

의자에 앉아 마냥 놀기에는 몹시도 매서운 칼바람.

그때 나무 사이로 작은 흙길이 하나 보여 끌리듯 들어가니 작은 숲이 펼쳐진 길이다.

집에 온 듯 마음이 스르륵 평온해지는 기분.

역시 나는 '물' 인간보다는'나무' 인간이구나. 싶다.

인간은 우리뿐인 조용하고 차분한 오늘 같은 날씨의 숲길. 그래도 다행히 사람이 통행하는 길이 맞나 보다.

간간이 작은 나무 이정표가 성당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평온하게 뚜벅이며 만난 작은 성당과 이어진 물길과 호수는 그야말로 꿈에서나 보고 깨어나 그린 듯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티 없이 맑고, 투명한 풍경이다.

이런 곳에 내가 서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그런 곳.

작지만 존재를 압도하는 그곳에 서서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린다.

다음 주에 또 오자 토미!


돌아오는 버스엔 슈퍼마리오 코스프레를 한 듯한 할아버지가 사과 한 봉지를 들고 탑승하여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사과를 하나씩 나눠 주도 모두 함께 먹는다.

모두 여행 일행인 듯한 즐겁고, 정겹고, 따뜻한 시간이다.

일행 중 운전자는 차 안에서 담배를 피워 일행 중 누구는 지옥을 경험했다는 후담.

그리고 이 버스는 꼭 앞자리에만 탈 것. 후아. 결국 엉덩이와 허벅지에 멍이 들고 멀미가 난다.


오늘이다. 

오늘이야말로 호숫가를 온통 점령한 깨벗은 인간들이 없는 유일한 날일 거야. 여기가 그런 것처럼!!

처음 오흐리드에 도착해 산책 중 만난 호숫가 식당에서 토미와 앉아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 후로도 내내 시야를 점령한 깨벗은 무리들 덕분에 그러고 싶은 날이 없었다.

열심히 밥해 먹고, 간식 먹고, 술 마시며 살고 있는 우리의 유일한 외식은 

유일한 비건 식당인 닥터 팔라펠에서 팔라펠 샌드위치와 후무스였다.

나는 상관없지만 토미가 좋아하는 것 좀 먹이며 같이 호수를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호수 쪽으로 걸어오니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비수기인 듯한 유명 식당은 뜯어내고, 폐쇄를 한 상태이고

우리가 내내 가고 싶었던 식당도 야외석은 모두 걷어낸 상태.

아. 깨벗는 무리가 없어지면 야외석도 없구나...

내가 너무 몰랐네...

그나마 외부석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으려는데 한가한 직원들이 온통 담배를 들고 뻑뻑.

대피해서 거의 길가에 내어 놓은 자리에 자리 잡고 앉는다.

뭐 여기라도 호수와 바로 대면하니 좋다.

음식이 나오니 슬슬 냥돌이들이 모여들고 멍돌이 한 녀석도 발밑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줄 것은 채소와 빵뿐이라 조금씩 나눠주니 이 녀석들 냄새를 맡더니 안 먹는다.

고기와 생선, 맛과 향이 강한 맛난 음식들을 워낙 많이 얻어먹었을 테니 먹을 리가 없는 건 당연한 건가?

그러고 보니 탈린에서도 핀란드에서도 모두 애들이 우리 것은 먹지 않았다.

야외에서 사람들이 모두 갈매기와 까마귀들에게 음식을 강탈 당해 소리치며 도망 다닐 때에도 

우리는 평온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물만 먹는 인간의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녀석들 덕분에 야외 식사도 평온하게 할 수 있었다.

오흐리드의 이 녀석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하하하.


별 볼일 없는 놈들이란 걸 안 냥돌이들은 포기하고 곁에서 잠시 졸다가 떠났는데 

멍돌이는 아예 발아래 자리를 잡는다.

손톱이 퍼렇게 되어 벌벌 떨며 눈과 배를 즐겁게 채우고선 추가로 주문하고픈 채소 요리가 안된다기에

2차로 팔라펠과 맥주를 사들고 집 테라스에서 해지는 풍경을 보고 먹자. 싶어 일어나 나서는데

멍돌이가 따라나서서 올드타운까지 함께 걷는다.

또 내 옆에서 나란히.

나무다리 위로 지나며 만난 사람들이 이 개가 내 가디언이냐며 신기하게 우리를 쳐다보고 지나간다.

아. 행복하다.

멍돌아.

그냥 곁에서 걷는 너라는 존재만으로도 무지 행복하다는 것을, 

네가 그렇게 행복을 주는 존재라는 걸 너는 알까?


오늘 만난 비, 우중충한 잿빛 하늘, 서늘한 바람, 빛과 같은 사람들, 새침한 냥돌이들과 다정한 멍돌이.

모두 고맙습니다. 좋아합니다. 행복하세요.


팔라. 차오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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