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지연 Feb 23. 2021

(Albania Tirana)
정말 그랜드. 해

알바니아 일지







2019.11.06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수시로 변하는 티라나의 가을 날씨.

예보가 매일 비. 인 날들.

차를 타고 몇 시간 옆으로 왔을 뿐인데 지중해성 기후라는 이곳은 아직도 아침 10도 안팎,

낮 20도를 웃도는 정말 좋은 가을 날씨다.

이제 봄과 가을을 도둑맞은 듯한.

한국에서 잊고 지낸 가을.이라는 계절을 이곳에서 느끼고 있다.


얼마 전 비 없이 예쁘게 흐린 날이기에 서둘러 나선 외출 길.

집을 나서자마자 어마어마한 폭우가 쏟아져서

어쩔 수 없다. 핑계 김이 홀딱 젖어버리자!

비와 함께 완벽하게 홀랑 젖으며 입꼬리를 귀에 걸고 나섰다.

그런데 우산 든 사람들도 모두 비가림막이 있는 곳에서 가만히 비를 피하며 정지 상태.

희한하게 갑자기 인도가 한산해지고 모두 상가 앞에서 미어캣 마냥 정지 상태로

더 젖을 부분은 이미 없어진, 용감하게 빗속을 걷는 이방인 둘을 평소보다 더 뚫어져라 관람한다.

그렇게 우리 세상인 양 그렇게 나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절대 멈출 것 같지 않았던 비가 잦아들더니

어느새 멈춤!

어라. 이게 아닌데!

비가 그치고 다시 복잡해진 인도엔 모두 뽀송한 멋쟁이 행인들인데

다른 차원에서 온 것처럼 우리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로 활보하고 다니니

이번에도 실시간 슈퍼스타가 따로 없다.


그렇게 며칠을 이곳의 우기와 함께 지내다 보니 비의 흐름이 제법 파악되었다.

오늘도 아침에 하늘과 공기를 먼저 만나 인사하고 비가 오는 하늘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며칠 미뤄두었던 집 근처 그랜드 티라나 공원으로 출발!

아침 산책엔 무거워도 아침 식사 바나나는 필수다.

조금 걸으니 또다시 부슬부슬 거리는 비.

우산을 꺼내 쓰고 걸으며

더 많이 오면 잠깐만 가림막 아래에 서서 비 보며 기다리면 돼!

한결 여유롭다.

꼬마 시절부터 미친 X 소리 들어가며 비 맞고 신나게 뛰어다니던 나.

비 맞는 건 좋지만 이미 빵꾸에 뒤축도 홀랑 파여버린 6년 차의 고마운 내 단벌 운동화가 

젖어서 마르지 않으면 다음 산책은 없다.


작은 수도에 서울만큼 복잡한 티라나.

뭐 그럭저럭 도로를 조금 벗어난, 매일 산책할 수 있는 길이 긴 할 테니 걸어보자.라며

알바니아,라는 나라만큼 아는 것 없고 기대도 없던 공원이다.

초등학교 뒷길로는 처음인데 여긴 꽤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듯, 꽤 돈을 들여 개발한 듯

인도가 시내 도로보다 넓고, 큰 극단에 쇼핑몰만 한 카페에, 여기저기 깨끗하고 번쩍번쩍하다.

이정표를 보니 산책로가 여러 갈래.

호수를 낀 산책로를 골라 걸으니 모든 길이 기대 이상이다.

호수와 땅이 콘크리트에 막힘없이 살아 있는 공원.

걸음걸음마다 흙을 만나고, 정말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들을 만나고, 빼곡하고 키 큰 나무들을 만나고

목소리 예쁜 새를 만나고, 둥글게 흘러가는 구름을 만난다.

올라가 보고 싶던 나무 위의 작은 집도 만나고, 길 멍돌이들도 만난다.

많은 격동의 시기를 거치고, 지금도 많이 급변하는 나라이고 도시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거의 있는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것이 감격스럽고, 고마울 따름이다.

괜히 그랜트 티라나 파크가 아니다.

이름 참 잘 지었다.

이곳 덕분에 티라나의 생활이 더 풍요롭고 아름다울 것 같다.

내가 다녀 본 얼마 안 되는 곳의 장소 중에서 산을 제외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을 본 적이 있나 싶다.

한참을 걷고, 서고, 보고, 먹고, 눈 감고.

처음 만난 그랜드파크와 다음을 기약하고 내려와 다시 식량 조달을 하러 늘 가던 마트로 향한다.


요즘 매일 지나다니며 매의 눈으로 훑어보는 것이 바로 뷰렉.

이쪽 국가들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뷰렉을 오흐리드에서 유일하게 비건 감자 뷰렉. 한 번 먹어봤다.

그렇지만 시금치 뷰렉이라는 것이 있대서 궁금하고, 먹어보고픈데

오흐리드에서는 오직 감자와 치즈 뷰렉뿐이었고 시금치는 며칠 전에 미리 주문해야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빵 류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열정까진 없고

먹깨비는 단지 길거리 음식이 고프고, 그 맛이 궁금할 따름이라 내내 훑어보는 중이었다.

며칠 지나다니며 만난 시금치 뷰렉은 모두 치즈가 들어있는 것이어서 먹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라! 찰나에 속을 들여다보니 허연 색이 섞인 것이 없이 죽은 풀색만 있는 작은 가게의 진열장.

대놓고 보고, 아니면 안 사기 미안하여 멀찌감치 서 다시 살피니 맞다!

주인아저씨께 여쭤보니 온리 시금치가 맞단다!!!

오호 오호! 재차 물어봐도 옆에 치즈가 든 것은 따로 있고 내가 본 것은 온리 시금치 뷰렉이다.

그럼 냉큼 먹어봐야지.

토미는 치즈 뷰렉, 나는 시금치 뷰렉.

너무 궁금한 나머지 제일 복잡한 로터리의 구석탱이에 서서 자리를 잡고 폭풍 흡입하는데.


서걱서걱.....

우격우격.

서걱서걱.....

옴마. 뭐지?

내꺼가 뭐가 씹혀. 빵가루인가?

설마 돌은 아니겠지....

우격우격.

시금치 뷰렉. 별 맛은 없네.

우격우격.


토미. 토미 것도 뭐 씹혀?

응? 아니.

난 뭐가 자꾸 서걱거리는데? 설마 흙인가?

톰 한번 먹어볼래?

어라. 이거 흙이네!

......

그렇구나. 흙이구나.

서걱서걱.


그렇다.

시금치에는 유난히 흙이 많다.

샐러드용으로 씻을 때도 제일 오래, 많이 헹궈야 하는 것이 시금치.

그렇구나.

아저씨 시금치 그냥 쓰셨구나.

나 그렇게 계속 흙을 씹고도 의심하기 싫어서 빵이 탄 게 씹히나 보다 하고 다 먹어버리고선 한입 남겼네.

시금치 뷰렉은 흙 맛이었구나.

이제 안 먹어도 될 듯하다.

한 풀었으니 됐다.


그 사이 또 빠르게 움직이는 하얀 구름과 검은 구름.

하늘이라는 변함없이 늘 깨끗한 도화지 위에 흔적 남기지 않고, 미련 남기지 않고 온전히 그림을 그려내는

구름과 바람.

티라나의 구름처럼, 하늘처럼, 바람처럼

오가는 것을 그냥 그렇게 흘려버리고, 내버려 두고 남김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온전하게 순수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Albania) 아무것도 모를 때 만족스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