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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Feb 27. 2021

(Albania Tirana)
겉도 속도 같아주세요

알바니아 일지






2019.11.08


오늘 새벽도 하늘부터 안녕.

하늘을 살피고 아래 세상을 살피니 길은 촉촉하게 젖어 있고 구름은 빠르게 흰색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다른 부분은 모르겠으나 미세, 초미세라 불리는 것의 수치는 거의 핀란드 수준이다.

서울에서는 한 달에 2~3번 공기 좋지 않은 날에 강제 환기를 할까 말까 하며 살았는데

이젠 수치 '20'만 넘어도 호들갑을 떤다.

팔자 좋다.

나서고, 창문을 열면 머리는 계속 지끈거리지만 헬싱키, 탈린에서처럼 차의 냄새와 담배의 냄새가

참으로 다르고 독하기 때문일지도.


처음 만난 커다란 티라나 공원과의 두 번째 만남을 위해 잘 익혀 둔 바나나 도시락을 들고, 우산 넣고, 

장바구니 에코백을 넣고 뚜벅뚜벅.

오늘 걷는 방향에서는  또 다른 나무, 또 다른 하늘을 만난다.

뚜벅이는 길, 눈에 밟히는 것마다 새롭고 놀라움의 연속.

항상 꿈꾸는 마다가스카르에 온 것 같은,

거대하고 기다랗고 이렇게나  크지만 머리가 둥글둥글 귀여운 나무들이 좀처럼 고개를 내리지 못하게 

시선을 강탈한다.

실시간으로 회색 구름이 물러나고 하얗고 파란 구름과 하늘이 나무들과 어우러진 모습에 

그냥 그 시간은 나에게 실시간, 매 순간 정지 상태.

여기를 보고, 저기를 봐도 올려다보는 풍경은 모조리 꿈속 같다.

바깥에 그런 숨 막히는 도시가 있는 것이, 그런 도시 안에 이런 숲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그런 꿈.


티라나가 좋다.

모든 게 번잡하고, 혼잡하고, 물가도 싸지 않고,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같이 느껴진대도

 '이 꿈'  하나면 내겐 충분히 고맙고, 아름다운 도시다.

꿈속에서 나와 다른 꿈으로 입장해야 한다는 것이 믿고 싶지 않을 뿐.

그런데  산책길 끄트머리에서 사슴을 가둬놓은 작은 우리를 발견하니 찬물을 맞고 

정말 꿈에서 깬 것 같다.

저 녀석 우리를 열어주면 달릴 수는 있을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사진을 찍고, 문을 열어줄 수는 없을까?


은근히, 아니 노골적으로 싸지 않은 물가 덕에 얼마 전 큰돈으로 장을 봤음에도 벌써 장을 봐야 하는 오늘.

생각보다 오래 뚜벅인 덕에 밥때가 되어간다.

오늘은 거대 부호처럼 외식 한번 할까?

외식을 마다 할 토미가 아니다.

티라나는 일명 vegan 가게는 없는 듯하다.

채식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식당은 꽤 있는데 우유, 계란, 치즈 모두 들어있어도,

마르게리타 피자 자체가 채식. 이니.

그래도 기본적으로 많은 가게들이 한국보다 재료를 빼고 넣는 주문도 시선도 수월하지만 

빵과 또 다른 빵, 채소만 덜렁, 튀긴 감자는 내게 그냥 식사라고 할 수 없는 그런 부분이 있다.

매일매일 한국과 달랏, 그리고 대만의 고구마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는 듯하다.

한국이 그리운 건 오로지 늘 먹던 과일, 생채소, 김, 고구마, 청양고추, 발아현미밥을 먹던 

단순하고, 배부르고, 맵고, 맛있는 식사다.

익숙함에 대한 갈망을 떠나 단순한 식사를 하기에는 늘 부족함을 느낀다.


어쨌든 공원을 나와 복잡한 로터리를 지나 멀지 않은 곳에 미리 봐 두었던  'Veggies'  라는 식당을 찾는다.

예쁜 가게들이 많은 티라나 답게  작고, 깔끔하고, 예쁜 식당이다.

그리고 역시나 애매하게 비싼 가게다.

한국의 교회와 편의점과 김밥 집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듯한 카페들의 커피와 

카페의 케이크, 빵류가 가격이 가장 저렴한 것 같으나 

내가 먹지 않는 것들이니 이곳의 저렴하다는 물가는 나와는 관계가 없다.

벽에는 온통  vegan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과시하듯 담겨 있는데 정작 vegan 메뉴는 

몇 개 되지 않는다.

하하하하하

항상 양이 적으니 각 2개씩을 주문하려다 가격이 저렴하지 않아 일단 3개만 주문하고 받은 

비건 두부 버거와 두부볶음 쌀국수, 타이 레드 커리는 역시나 양이 적다.

맛은 자극적이지 않고, 꽤 좋지만 먹깨비에겐 어린이 세트를 받은 듯하다. 이건 그냥 스낵이다.

항상 이것으로 주식을 먹는 이곳 사람들이 늘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서 밥을 먹은 후 커피와 케이크, 빵류 등 디저트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 아닐까.


채식, 비건 식당이라는 곳은 언제나 양이  참 적고, 뭔가 남들과 다름, 특별함을 강조하지만

좀 더 평범하게 보통의 사람들과 보통의 일상과 만나고, 양이 보통은 됐으면  좋겠다. 싶다.

채식, 비건, 식물을 먹는다고 누구나 다이어트를 하고, 가공품을 찾고, 적게 먹고 참는 것은 아니다. 

채식, 비건이라는 건 특별함으로 포장하고, 가공품이 많고, 조금 먹는 다이어트 음식이 대부분이라 

역시 이건 곳에선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배부르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많이 먹는 것이 좋다.

그건 한국이나 나와서나 똑같다. 사람 사는 건.

그래도  오흐리드에서 유일했던 비건 외식 2000원짜리 두툼한 팔라펠 버거는 추가로 하나 더 먹어서 4000원이면 배가 불러 좋았다.

역시 배고프게 먹은 이야기를 하니 흥분해서 말이 많아진다.


먹는 기별이 목구멍에도 가지 않은 것 같지만, 계속 뭔가 더 먹고 싶어 환장하겠지만 

3개 시키고 한화로 2만 원 나오는  애매한 돈을 지불하고, 

그래도 돈 주고 외식했으니 밤이 더 혼란스러운 시내를 걸을 오기와 용기가 생긴다.

항상 담배 사람과, 차, 혼잡함에 정신 줄 놓는 나를 위해 토미가 이번에도 찾은 다른 길.

오히려 저녁인데도 이곳은 길도 넓고, 이 정도면 한산한 편이다.

티라나에서 이토록 차분하고 고요한 푸른빛 저녁 산책이라니.

아이들 뛰어놀 곳은 없어도 넓고, 넓은 광장의 위풍당당 동상과, 탑, 

혼자 요란한 2층 메리 고 라운도 불빛도, 

오지게 비싼 서점의 책들도

주변을 끼고도는 소란 모두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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