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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Sep 23. 2019

(아직은) 초록별 일지

(Korea-Seoul) 서울 월세살이에서 지구별 월세살이 떠나는 날



보통 일이 아니다.

매년 하는 이사에 매년 수시로 다니는 여행이지만

대충대충 구겨서 트럭에 실어 옮기던 이사가 아닌 가진 짐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 이사,

무게 초과를 고민해본 적 없는 배낭여행에서 

킬로수를 맞추며 짐을 싸야 하는 여행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이미 최소한의 것만 갖고 단순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빨리 짐을 싸는 날이 오기를 그렇게 바랬건만

이건 아무~~런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 육체적 중노동이었다.

일기와 오랜 작업 도구와 작품, 노트를 하나하나 다시금 훑어보며 

버릴 것인지 트렁크에 넣어야 하는 것인지,

가져간다, 아니면 버려야 한다. 이 고민들이 가장 힘들었고

일상에서와 이사 다니고 살 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쓰레기를 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들었다.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다니.

이렇게나 쓰레기를 많이 버려야 하다니......

중고로 팔고, 나눔 하고도 처분해야 하는 것들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팬티 한 장까지도!!!

그렇게 기다려오던 시간이

온갖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건 왜 필요했을까.

이건 왜 갖고 있었을까.

왜 이것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왜  나는 옷도 필요하고, 노트도 필요하고, 크레파스도 필요한

인간이라는 동물인 것일까.

왜 이렇게 해서까지 나는 떠나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행정, 서류가 뭐가 그렇게 많이도 필요한지...

방학천, 중랑천을 산책하며 늘 부러웠던 자유로운 새 친구들과 같은 부류의 존재이고 싶었다.

떠나기 3일 전부터는 거의 잠을 안자면서 정리를 해야 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정리와 짐 싸기와 준비가 끝났다.

여행 준비만큼은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가야 편안한 여행을 다니는데

나사가 모두 반 이상 풀려버린 선풍기처럼 털털 털털 털.

이 정신으로 긴 여정의 시작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잊을 만큼

멍한 상태의 이사와 여행은 처음이다.

첫 목적지는 베트남의 달랏.

첫 여정은 서울에서 인천, 인천에서 호치민, 호치민에서 몇 시간 숙박 후 달랏, 

달랏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긴 여정인데 

술을 밤새 마신 상태처럼 영 정신이 정돈이 안되있다.

멍~ 해서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어쨋든 정리를 다 했다는 사실만 놀라웠고,

그렇게 바래온 날임에도 자고 싶다, 눕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서 

늘 즐기던 가는 길의 즐김이고 뭐고

빨리 달랏에서 짐을 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그렇게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와, 길을 나섰다.

너무 똑똑한 사람은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백만 가지 늘어놓고 하지 않는다지만

똑똑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생각이 들면 무조건 해야 하는 나는

그 이유를 찾지 못해서, 존재답게 살고 싶어서 지구 산보를 나섰다.

운동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트렁크를 끌고

그렇게 한국의 가장 복잡한 동네 서울에서의 월세살이에서 

다른 곳에서의  세입자 살이를 시작하려고 한다.

보고 싶다며 울어주는 벗, 회사의 월차를 내고 공항까지 출발하려는 벗, 

나라서 믿고 보이지 않는 곳이라도 늘 등 뒤에서 응원한다는 벗,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만 한 조각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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