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행복한 곳
어느덧 20일이 되었다.
여행을 다닐 때는 눈을 뜨기 무섭게 새벽부터 밤까지 걷고 또 걷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뚜벅이인데
트렁크 하나로 이사를 와 일상을 지내는 생활을 하다 보니
여전히 일상과 여행 둘 사이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하루 뚜벅거리고, 하루 집에서 어슬렁거리고, 좋다 싶다가
원래 계획이라면 사아레마 쿠레사레에도 갔어야 했고,
여유가 된다면 주변 도시에 잠깐 여행을 다녀왔어야 했고
뭔가 그런 것들을 접고 나니
이거 그래도 해외에 나왔는데 뭐 좀 해야 되고 봐야 되는 거 아니냐는
나답잖은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어제, 오늘은 이제 8월 말부터 시작되는 마케도니아 스코페와 오흐리드 집 예약을 끝내고
이제 슬슬 빨간 군단이 헤집어 놓을 시기가 되어 좀 많이 걸어야겠다 싶다.
갑자기 통밀 파스타와 버섯을 버무려 간장 파스타로 도시락을 준비하고
역시 해가 잠잠해지는 5시에 나선다.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걸어서 Pirita 라는 곳의 강줄기를 보는 것인데
집에서 걸어가면 1시간 30분 정도 거리라
화장실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의 이동을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에 경로를 줄여
Kadriorg 공원에 가기로 한다.
가는 길이 대로변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탈린에서 처음 보는 담장과 울타리 없는, 상점도 별로 없는 주택가들 사이에서
엄청 긴 희한한 건물도 보고, 유치원을 지나며 귀여운 꼬마와도 빠빠이 하고
쭉쭉 골목골목 구경하며 슬슬 걷다 보니 널찍한 공원이 보인다.
나무가 깎이고, 분수가 있고, 그늘이 없는 공원을 좋아하지 않지만
역시나 붐비지 않고, 여유 있게 책 읽고, 바라보고,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 좋다.
맥주 생각이 절로 나는 풍경이다.
여전히 민들레 홀씨들이 나풀거리고 여전히 해가 피부를 아프게 태우지만
슬슬 걷기에 좋다.
나무가 깎이지 않고 더 높았으면 좋겠다! 둘러보는데 놀이동산이 있다.
오호!
세상에나.
완전 어린이, 아니 어린이보다 더 어린 아기들을 위한 놀이동산이다.
놀이기구들의 미니어처들을 보는 것처럼 탄성이 절로 난다.
이렇게 작은 메리 고 라운드라니!
이렇게 날으는 코끼리라니!!!
오호오호!!!
놀이동산을 좋아하던 시절에 보았던 그 어떤 놀이기구보다 작다.
한국에도 이런 사이즈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항상 커다란 놀이기구 앞에 키 높이가 정해져 있어
어지간한 어린이가 아니면 탈 수 없는 놀이기구가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매표소도 없고, 놀이기구마다 직원도 없다.
망한 곳인가?라고 보니
아이들이 타겠다고 하는 놀이기구에 직원들이 가서 작동시켜주는 것 같다.
정말 5살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들이 놀이 기구를 타고, 엄마에게 조르고 있는 풍경.
귀엽다.
같이 놀아주는 직원들도 참 참을성 있고, 친절해 보인다.
냥돌이를 볼 때처럼 흐뭇하고, 즐거운 마음을 안고 이동하니
곳곳에 많이 배치된 벤치에서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꽃 냄새를 맡는 아이, 갈매기를 쫓는 아이
유독 귀여운 아가들이 많이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공원조차도 시끄럽지 않고, 널찍하고 여유 있는 모습에
한국 도롯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생각난다.
잠시 앉아 토미팬더를 옆에 두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다보니
배가 슬슬 고파 도시락을 먹으려는데
어찌나 맥주가 당기는지.
당연히 야외 도시락엔 맥주가 짝꿍인데 공공장소 음주가 금지이니 지킬 수밖에.
건전하게 도시락밥을 먹는데 맞은편엔 너도 나도 와인도, 맥주도 마구마구 먹는다.
약이 오르고 나도 에라이! 라는 생각에 미칠듯한 갈등이 들지만
잘 참고 통밀을 우격우격 씹어 넘긴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마구 하는 것들이 싫기 때문에 남의 나라 법을 지키고 싶다.
그래도 몰래 텀블러에 넣어 다니며 먹을까,
사람 없는 후미진 그늘 공원을 봐두었다가 꼭 먹어볼 테다
라는 생각은 매일 수백 번 한다.
결국엔 집으로 돌아와 냥돌이와 까마귀와 갈매기를 훔쳐보며
오늘도 사쿠와 함께 쨍한 밤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