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지연 Nov 01. 2019

(아직은) 초록별 일지

(Estonia-Tallinn) 갈매기도 건드리지 않는다.





또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고 있는 쓰나미 같은 빨간 군단.

정말 싫지만 흰머리가 늘어가고, 한해 한해 나이가 먹을 수록

끝날 날이 다가온다고 위로하며 이번 달도 기어 다니고 있다.

오늘은 허리는 겨우 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는데 집에 있을 수 없다.

내일과 모레는 에스토니아의 공휴일이기 때문이다.

미리 달력에 체크해 놓고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 집주인장 트린에게 물어보니

마트는 문을 모두 연다고 한다.

그런 답을 받았지만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정말 그대로 있다가 쫄쫄 굶을 수 있으니

미리 식량 확보를 해야 한다.

정말 자의로 인해 짧은 과일 단식과 공복을 가져도 

마트가 문 닫아서 강제 단식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암...

먹는 게 삶의 반이다.

암....!


또 올드타운을 거친다.

그냥 정말 예쁜 동네 길이다.

매일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속속 보이니 지루하지 않다.

올드타운에서 시장이 이어지는 끝자락에 작은 호수가 있는데

그곳을  좋아한다.

뭔가 다른 세상인 것 같은, 

여기야 말로 간판도, 사람도 없이 돌벽과 소담한 자연이 보이니

중세의 어느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오늘은 뭔가 시끄럽고 새들이 더 분주하게 움직여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가 한가득 밥을 퍼주고 계신다.

탈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새들이 다 집합해서 밥을 먹는다.

갈매기, 오리, 참새, 비둘기, 까마귀...

우리처럼 다른 행인들도 궁금했는지 멀찌감치서 들여다보더니

누구는 손가락질하며 뭐라 뭐라 하고

누구는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한다.

뭔지 알 것 같지만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굶어죽을까 봐 꾸역꾸역 다시 발걸음을 옮겨 시장에서 과일을 사고

유기농 매장에서 샐러드와 채소를 사고

저녁 시간이 되어 바나나를 사 처음으로 시장의 벤치에 앉아 먹는다.

사람도 보고, 기차도 보고, 갈매기도 보고... 어....?

뭔가 갑자기 시끄러워져서 보니

주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햄버거와 케밥을 먹는데

갈매기가 날아서 강탈하고 있는 현장이다.

크흐흐흐흐!

난리도 아니다.

핀란드 다큐에서나 봤고, 첫날 소녀의 햄버거를 강탈하는 갈매기를 봤는데

이렇게 광장 모두의 버거를, 갈매기 단체가 강탈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태연히 있는 사람도 있고, 건물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난리다.

그런데 더 늘어놓고 먹는 우리는 예외인가 보다.

오호.

그렇구나.

이 녀석들이 식물식 하는 소위 비건, 채식인의 음식은 건드리지 않는구나.

맛없어서......

녀석들은 바닷고기와 육지 고기를 먹는 녀석들이라

우리가 먹는 바나나 따위는 건드리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난리 통에도 우리만 차분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는 

오늘의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은) 초록별 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