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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Nov 07. 2019

(아직은) 초록별 일지

(Estonia-Tallinn) 잠자고 있던 욕 한 바가지

         




하지가 지나서일까?

어젯밤은 제법 어두운 하늘이어서 감은 눈 사이로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드디어 비가 밤새 왔었나 보다.

타는 듯한 태양 레이저로 강제 기상시키던 하늘빛이

어둡고, 우중충하고, 선명하다.

요 며칠 제발 비가 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는데

정말 어둡고 촉촉한 하늘빛이 되었다.

어제도 이어진 음주를 풀어내려 108를 하고, 과일을 먹고

오늘은 일찍부터 나서기로 한다.

이런 날이 또 언제 오겠는가!


탈린 내에게 가장 가보고 싶었던 피리타 쪽.

그쪽의 바닷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무슨 오기인지,

사실 오기가 아니라 탈린에서의 마지막 외식은 

근처 식당이나 바에서 바닷가를 바라보며 

(식당보다는 그냥 바다가 보이는 곳에 털썩 걸터앉아서 먹는 것이 가장 소원이지만 그건 불법이라 하니...)

생맥주를 마시는 것이 토미와 나의 가장 큰 희망사항이었다.

집부터 거리가 도보 1시간 50분으로 나오지만

언제나 걸어 다니는 우리는 걸어서 가고 싶다.

아차.

근데 한가지 걸림돌이 있다.

바로 화장실.

그놈의 화장실.

서울 쌍문동에서는 개천 길을 걷다가도 화장실을 쉽게 만나고

산을 걷다가도 화장실을 정기적으로 만나고

아무리 오래 걸어도 지하철이나 마트 등을 이용하면 되니 전혀 문제로 생각해본 적이 없던 부분이다.

오늘도 고향국의 화장실 인심을 그리워하며

공공화장실이나 마트 등의 위치를 파악하고 출발한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날씨!

이렇게나 좋은 하늘!

바람막이를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한 날씨에 마스크도 쓰지 않고 걷는, 

서울에서 그렇게 원하던 것을 하고 있다.

마스크 쓰지 않고 걸어보기.

와 좋아!

거기는 그래도 올림픽 요트 경기장 뭐 그런 거라니까

분명 뚫려 있고, 정돈되어 있을 거야.

크크크

이런...

그 와중에 화장실에 대한 불안함을 계속 넣고 다녀서 그런지

40분쯤 걸으니 신호가 온다.

저기에 화장실 있다고 했어!

가보자!

없다.

놀이동산 안에 있는 화장실은 문이 잠겼고

인포메이션에서 물어본 자리에는 화장실이 없다.

망할 에스토니아!

욕이 절로 나온다.

가까운 곳에 그래도 마트가 있단다. 

마트가 있는 곳엔 화장실이 있는 법이지!

없다.

둘어봐도 없어서 물어보니

우리 마트에는 화장실이 없어.

뭐?

그럼 니들은 어디서 싸는 거야????


비가 갑자기 마구 쏟아져 내린다.

급한 와중에 비를 맞는 것은 또 기쁘다.

그나저나 

돌아서 공중화장실 표시 있는 곳을 찾아가자.

그 와중에 봐도 탄성이 나오는, 공원이라고 볼 수 없는 숲 같은 곳이 나오고

마침 일하시던 분들께 여쭤보니 우리가 가는 방향이 맞단다.

그곳은 바로 지도에서만 보던 재패니즈 가든.

여기저기 웅덩이를 만들어 놓아 고여놓은 물 때문에 날 친구들이 장난이 아니다.

그 사이 보이는 이상한 캡슐 하나.

......

......

외계 생물이 타고 있을 법한, 지구의 생물이 들어가서는 안될 것 같은 캡슐 하나.

내가 저기 들어가서 바지를 내려야 되는 거야????

맙소사.

지나가면서 본 외계의 것이 화장실이었다니...

넓고 넓은 공원, 부지런히 가꾸고 있는 이 아름다운 공원이라는 곳에 저것이 화장실이라니.

20센트를 넣고 거의 죽을 상으로 들어가니 

손 닦는 곳도 없고 오줌과 똥으로 입구가 축축한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닭살이 돋고, 입술이 네모가 될 정도로 

인생 최악의 화장실이다.

이 정도면 풀숲에서 자연을 마주하고 노상방뇨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싶을 정도다.

동남아나 중국 화장실 보면 욕하던데 니들은 정말 중국 욕할 자격이 없다.

니들의 이 외계 똥통에 비하면 중국과 동남아 시골의 화장실은 

황제의 똥간이다 이것들아.


돌아버릴 것 같다.

그 와중에 웨딩촬영한다고 드레스 입은 떼가 몰려드는데!

니들은 대체 그러다가 급하면 드레스 입고 캡슐에 들어가니?

아님 차 타고 알고 있는 화장실로 가니?

매번 카페의 화장실로 가니?

근데 왜 어디에도 손 닦는 곳은 없는 거니?

그러고 보니 화장실에서 손 닦는 사람을 본 적도 없지만 그건 한국에서도 비슷하니 그렇다 치고

그렇게 커피 마시고, 병나발 불고 다니고, 여기저기 맨날 술 마시던데

그렇게 마셔대면 소변이 마려운 법인데

대체 너네는 어디서 싸는 거니?

어딜 가나 찌린내가 나는 이유는 그냥 화장실이 없어서 길에 싸기 때문이니?

스타킹은 수천 개가 있어도 화장실 슬리퍼는 없고

변기 물청소도 못하게 되어 있고

그래도 변기 밑에는 더러운 러그가 깔려있는 화장실

왜 그렇게 지저분하게 사니?

담배는 

애나 어른이나 임산부나 애 엄마나 애 아빠나 노인이나 차별 없이 미친 듯이 피워대고 말이다.


손 닦고 싶다.

아니 샤워하고 싶다.


그래도 가자. 토미

우리 가려던 곳으로 가자.

비가 장대처럼 쏟아져 바람막이를 입고 오길 잘했다 싶다.

그런데 이제 길이 온통 공사판이다.

해안의 도로를 걸어야 갈 수 있어서 

그렇게 싫은 대로변을 걷겠다. 마음먹고 나왔는데

이건 대로변에 공사 트럭만 쌩쌩 달리고 사방이 걸을 수 없는 공사판이다.

안 갈래.

젠장.

이 길을 1시간 걸어야 되는데

가서도 어떨지 사실 이제 뻔히 예상되고, 기대도 안돼.

거길 꾸역꾸역 찾아서 바다 보고 더럽게 비싼 생맥주와 음식을 잠깐 즐기더라도

이 길을 다시 걸어야 할 이유는 없어.

내가 아무리 바다, 산보면서 마시는 맥주에 환장했어도 이건 아니야.

그렇다고 차 타는 건 더 싫어.

그냥 돌아갈래.

돌아오는 길에 급하면 또 저 화장실 들어가야 되는데

그건 정말 싫다 토미.


더 거세진 비를 맞으며 

그간 서울에서의 삶에서도 꾹꾹 참아오던, 잊고 있던 욕 세포가 살아나

마구마구 속사포로 쏟아져 나온다.

중심만 번지르르 하고,

주변은 다 엉망진창이고,

정말 과하게 꾸미고 다니지만 화장실에서 손도 닦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

떡칠 화장 한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고 있어도 그래도 이건 좋으니까.라며 참고 지내 온, 

모른척하고 싶었던 화장 뒤의 모습, 민 낯이 

오늘 쓰나미처럼 모든 것을 보고 겪었을 뿐이다.

걷는 길이 왜 이렇게 한산하나 좋다 싶더니 도로는 차로 넘쳐나고

사방이 공사 중이고

전 인구가 담배를 피우는 것 같고

그렇게 아픈 몸을 하고도 소세지, 고기, 치즈 코너에 사람이 미어터지고

대형 쇼핑몰을 가도 휴지도 없고, 찌린내 나는 20센트 유료 화장실을 써야 하고

게다가 사람 숨도 못 쉬게 하는 길담배는 합법이고 맥주 한 병은 불법이고?!!


젠장.


맥주를 샀다.

터미널이 있는 하버에 

요트가 있는 물구덩이가 있고, 거긴 화장실도 있으니

앉아서 먹기로 작정했다.

마구마구 불법을  행해주겠어!!

마구마구 넘어간다.

꿀꺽꿀꺽 잘도 넘어간다.

이 정도만 할 수 있어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무척이나 행복하다.

그래도 그래도...

하루 종일 본능, 욕심, 갈망에  휘둘린 것 같아 불편한 건

결국 온전히 나이다.

그래도 그래도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의 탈린을 받아들여야 한다.

좋은 낯짝도 싫은 낯짝도.

평정심을 유지하다가도 이런 일이 닥치면 정신줄을 놓고

잊고 있었다고 생각한 욕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직도'의 있는 그대로의 나도.


그래도 그래도

도망치듯 떠나 온 이유 중 하나인 공기는 한국보다 나은 덕에

마스크 안 쓰고 다닐 수 있으니까.

나무도 많이 볼 수 있으니까.

갈매기도, 고양이도, 까마귀도 많이 볼 수 있으니까.

굶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탈린은  다시 오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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