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아들. 부자(父子) 관계이자 아빠의 마음을 부자(富者)로 만드는 소중한 존재. 나는 인생 최고의 선물인 아들을 2000년 여름의 끝자락에 얻었다. 새벽에 진통이 와 병원으로 달려간 아내는 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아이를 낳았다. 거의 탈진 상태에서도 자연분만을 포기하지 않은 아내가 자랑스러웠다. 드디어 나는 어엿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아빠와 아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붕어빵이지만, 그런 까닭에 관계가 안 좋아지기도 한다. 너무 좋아하고 과도하게 기대를 하다가 이내 실망하고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애증의 줄다리기. 내가 어린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우리 부자가 꼭 붙어 다니는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숨 쉬며 나에게 하는 말. "다 소용없어요. 애가 크면 보나마나 사이가 안 좋아질 텐데, 그때 가서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물론 그럴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나도 주위에서 급전직하 관계가 악화된 아빠와 아들을 많이 보았으니까. 하지만 내심 우리는 다를 거라고, 한결같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모범적인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다짐했다. 어린 시절 반짝 좋아했다가 아이 머리가 커지면서 서먹서먹해지고 나중에는 무관심하거나 원수지간이 되는 불상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빠와 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친근하지만, 가장 서먹하고 어색한 관계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20년 동안 나와 아들의 관계는 대체로 화창했다. 가끔 먹구름이 끼거나 폭풍우가 몰아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그동안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데 누가 더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당연히 나는 아빠가 헌신적으로 노력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반면, 아들은 자기처럼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아들을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고 강변한다.
누구 말이 맞든 그게 무슨 대수랴. 분명한 사실은 지난 20년 동안 나는 아들과 찰떡궁합으로 지내왔다는 점이다. 앞으로 20년, 그리고 또 20년을 지금처럼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지난 20년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온고이지신이란 말이 있듯이, 지난 일을 차분히 반추하다 보면 다가올 미래를 보장하는 행복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말 그대로 야구광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등학교 야구중계를 TV로 보다가 야구라는 스포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남달리 한자를 많이 알게 된 이유도 신문의 스포츠면에 실린 야구 기사를 탐독했기 때문이다. 어린이날 선물로 야구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아버지가 말했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물론 엄청난 인파로 이미 매진된 동대문야구장 앞에서 허탈한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고등학교 야구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 높은 성인야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개막경기를 시청하다가 운명처럼 MBC 청룡을 응원하게 되었다. 이후 엘지 트윈스로 이어진 40년 열혈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마치 모태신앙처럼, 아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무적 엘지!"를 외치며 아빠와 야구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아빠랑 같이 나들이 가는 마음으로 따라나섰을 것이다. 아빠가 경기에 일희일비하는 동안 마음껏 치킨을 먹으며 모바일 게임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아들은 점점 나이가 들면서 아빠가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야구에 열광하는지 공감하게 되었다. 직관하는 날, 엘지가 극적인 승리라도 하게 되면 우리 부자는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응원가를 신나게 부르며 동지애를 만끽했다.
나는 아들과 잠실야구장에서 진한 추억을 쌓았다. 엘지가 승리하며 축포가 터지는 순간의 기억은 강렬하다
아들이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의 야구 사랑은 절정에 달했다. 휘문고 출신이자 엘지의 심장인 박용택 선수가 최다안타 기록을 갈아 치울 때마다 우리는 자기 일처럼 흥분했다. 잠실 근처에서 4년 정도 산 적이 있었다. 저녁 식사하며 야구를 시청하다가 7회쯤 엘지가 경기를 역전하면, 나와 아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바로 잠실경기장으로 달려갔다. 야구장의 함성과 응원가 소리에 맞춰 우리의 심장도 힘차게 요동쳤다.
차면 기우는 것이 세상 만물의 진리이듯이, 나는 해마다 희망고문을 하며 실망을 안기는 엘지 트윈스에게 조금씩 열정이 식어갔다. 아들은 NBA 프로농구와 e스포츠에 푹 빠진 채, 야구는 아빠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려서 함께 캐치볼을 하고, 야구장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하나가 되었던 우리의 경험은 이제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아들을 둔 아빠의 로망 중 하나는 함께 목욕탕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때도 밀어주며 진한(?) 남자만의 우애를 나누는 것이다. 콩알만 한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함께 목욕하는 부자의 모습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드디어 나에게도 그런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다. 아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나는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자고 있는 아내 몰래 아들을 데리고 동네 사우나로 갔다.
그러나 3살짜리 아들과의 꿈결 같은 첫 번째 사우나 나들이는 잊지 못할 비극이 되고 말았다. 목욕을 무사히 마치고 내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사이에, 아이가 정수기 온수 밸브에 손을 댔다가 화상을 입은 것이다(이후 정수기 온수 밸브는 이중 열림장치로 바뀌었다). 아이의 연약한 손등 피부가 벌겋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서 간신히 치료를 하면서 아내에게 연락했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아내가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고, 한동안 나는 죄인처럼 지내야 했다.
아들이 초등학생 나이가 되자 우리는 본격적으로 물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복합 워터파크가 여러 곳에서 개장을 했다. 수영장에서 슬라이드 타면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나면 따뜻한 온천수에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해도 지루해하지 않는 아이를 옆에서 돌보는 나는 저녁에 녹초가 되곤 했다. 물에 익숙해진 아들은 본격적으로 수영강습을 받기 시작했고, 접배평자 순서로 혼영을 하는 아이의 모습을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워터파크에는 실내수영장과 야외 온천이 있기에, 사계절 언제든 아이와 신나게 이용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이제 아빠와 덩치가 비슷해진 아들과 나는 시간 날 때마다 동네 사우나에 가서 피로를 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기 힘들어했던 아이가 이제는 습식과 건식 사우나를 들락거리며 제대로 즐기게 되었다. 히노끼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아들과 함께 있노라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아빠가 된 느낌이다.
아빠와 야구장에 가서 목이 쉴 정도로 함성을 지르고, 사우나에서 땀을 흠뻑 흘리며 함께 힐링하던 아들이 지금은 내 곁에 없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길을 떠난 아들을 생각하면 어느 순간 마음이 적적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동안 야구장과 사우나에서 쌓은 아들과의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아빠와 아들의 행복한 동행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