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 / 김사인 글
가벼히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만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사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 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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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시들해졌다는 말씀인가? 그래서 기다리든 말든 딴전이나 좀 피우겠다는 것인가? 약속을 어기고 고작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겠다고? 유치한 가학취미인가?
아닐 것이다. 이 시를 가만히 더듬노라면 나는 온몸의 맥이 풀리고 가슴이 서늘해진다. ‘애인’과 ‘한눈팔기’와 ‘풀잎사귀’와 ‘절 한 채’로 이어지는 마음의 보폭에는 뭔가 아름답고 신비로운 바가 있다. 그리고 행간에 서린 허허로움, 덧없음과 혼곤함, 청초함들, 그 모든 표정의 착잡함을 시인은 ‘가벼히’란 어휘 하나의 절묘한 뉘앙스로 능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시란 예로부터 대개 북받치는 그리움의 하소이거나 어긋남의 회환, 자탄, 원망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이 시가 보여주는 마음의 길은 어떤가? 연정의 뜨거움과 조급함과 정면성을, 서늘함과 해찰과 엇지르기로 체돌아 지체시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그리움을 더 생생하게 보전하고 누리는 기술, 사랑의 총량을 키우는 기술! 이 독보적인 마음의 기술과 미학으로써 미당은 비로소 미당일 터이다.
빠른 춤보다 느린 춤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이라면, 이 시의 ‘한눈이나 좀 파’는 일이며, ‘가벼히’란 것이 결코 말처럼 수월한 경지가 아님도 짐작할 것이다.
필사22 / 2022.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