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여행의 이유 ; 9일 차 (~ 198p)
『여행의 이유』<9일 차 ~198p>
우리들 대부분은 돌아올 지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올 곳,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내 집과 내 물건이 있는 곳은 여정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여행의 원점. 여행이 실패하거나 큰 곤란을 겪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 그곳에서 우리는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p.191)
<단상>
작가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나 역시 지역을 넘어 옮겨다녔다. 그래서 지금도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 앞에서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사투리를 익히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고, 새로운 풍경은 늘 낯섦과 불안을 불러왔다. 결혼 후에도 남편의 직장을 따라 옮겨 다니며, 안정은 내게 손에 닿지 않는 먼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 불안은 나에게 늘 해피엔딩을 확인한다. 최소 눈에 보이는 확증이 어느 정도 예상되어야 비로소 마음을 내어 놓을 수 있다. 같은 이유인 것 같다. 드라마도 책도,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을 확인하고서야 편히 시작할 수 있다.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집을 더 좋아한다. 오래 집에 머물면 금세 지루함을 느끼지만, 막상 떠나려 가방을 꾸릴 때면 어김없이 우울이 스며든다. 그럼에도 떠날 수 있는 건, 돌아올 집이 있다는 사실 덕분이다.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불안을 내려놓는 자리이고 다시 숨을 고르는 안식처다.
나는 여전히 떠도는 중이다. 돌아갈 집을 품고 떠나는, 조금씩 다른 방식의 유랑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