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다정하게

박웅현의 시 강독

by 지영

<필사>

남쪽 창문을 열어놓는다

일요일 오전이 한바탕 집 안으로 들어온다

게으르게 펼쳐놓은 경전은

내 몸 속으로 진입하지 않는다

- 이문재 <입춘> 중에서 -

“남쪽 창문을 열어 놓는다. 일요일 오전이 한바탕 집 안으로 들어온다.” 좋지 않습니까? 일요일 오전, 남향으로 난 창문을 열어 두니 오전의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p79


함민복 시인은 “봄은 한 옥타브 올라간 새소리들의 잔치”라고 말합니다. 한 옥타브 올라간 새소리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헤르만 헤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이들은 다 안다. 살아라, 자라라, 사랑하라, 즐겨라.” 봄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헤세는 말하죠. 그러니 한 옥타브 올라간 새소리일 수 밖에요. p81

서정주 시인은 <바위와 난초꽃>이라는 시에서 바위가 몇천 년씩을 침묵으로만 웅크리고 앉아만 있어서 난초는 그런 바위의 무뚝뚝함이 답답해 꽃을 피운다고 말합니다. p84


<필사>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작가들의 그 깊은 마음과 만나지면, 내가 글을 쓴다는 건 정말 불가능해보인다.

그래도 덕분에 풀과 나무와 꽃,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 너머의 마음까지 읽고 싶은데... 이건 조금 넉넉한 마음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늘 급하다. 조급하다. 여유를 가지고 싶지만... 늘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고자 한다. ㅠ


그래도 오늘 동네 공원에서 잠깐 햇살받으며 활짝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대구의 봄은 서울보다 빠르다. 낯선 도시에서의 즐거움이랄까...


책 속에서 만난 시입니다. 도종환님의 <지는 동백꽃 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내 인생도 꽃잎은 지고 열매 역시

시원치 않음을 나는 안다

담 밑에 개나리 환장하게 피는데

내 인생의 봄날은 이미 가고 있음을 안다

몸은 바쁘고 걸쳐 놓은 가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거두어들인 것 없고

마음먹은 만큼 이 땅을

아름답게 하지도 못하였다

겨울바람 속에서 먼저 피었다는 걸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나를 앞질러 가는 시간과 강물

뒤쫒아 오는 온갖 꽃의 새순들과

나뭇가지마다 용솟음치는 많은 꽃의 봉오리들로

오래오래 이 세상이 환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선연하게도 붉던 꽃잎 툭툭 지는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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