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이 지구를 덮친지도 올해로 3년 째, 마치 이 문장이 어느 SF소설의 첫 문구 같지만
우리가 경험한, 여전히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끝을 알 수 없다.
2020년 2월, 집 앞의 수퍼 마켓에 중국 관광객이 이것 저것 물건을 고르면서 중국어로 말하는데, 여느 때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이 왠지 뉴스에서 접했던 '우한 폐렴'이 사람간에 전염이 된다는 말에 서둘러 필요한 물건을 집어 들고 그들을 피해 계산대로 갔다. 연일 뉴스는 '우한 폐렴'으로 난리가 났고, 나중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covid-19' 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를 써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간의 비말감염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엄청난 소식,
이미 전 세계에 감기와 독감으로 죽는 사망자가 기저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데, 이번에는 스페인 독감과도 다른, 사스, 메르스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 지구인을 한꺼번에 죽일 수도 있다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계속 흘러 나왔다.
처음으로 '죽음'을 고민했다. 확진자 동선 공개 문자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내 핸드폰으로 그것도 내 집 바로 앞에서 쉬지 않고 날아 들었다. 그야말로 '집밖은 위험해'가 되어 버렸다.
고립감과 생존의 열망, 죽음의 공포가 한꺼번에 날아든 순간이었다.
지금은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이다.
이제는 코로나가 일상이고, 코로나에 익숙해져 바이러스가 변이에 변이를 거듭해 급기야 이제는 '스텔스 오미크론'이라고 불리어지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고 있다. 말 그대로 '뉴노멀', 새로운 일상, 다시 말해 코로나와 함께 사는 일상이 현실이 되었다. 이제는 하루 확진자가 38만명을 넘어섰다.
직장이고 어디든, 안 걸린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한 사람 건너 누가 걸렸네 하는 데도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목이라도 까슬까슬하면 혹시 하는 마음에 벌써 몇 번째 신속 항원키트로 코를 쑤신다.
그 사이 '마스크'라는 희망이 있었고, '백신'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희망을 찾고 기대를 꿈꾸며 일상을 살아낼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 세상은 그렇게 코로나 이전 세상과 이후 세상으로 나뉜다.
코로나 이전 세상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았고 해외에서는 마스크에 대한 거부 반응도 있었다. 자기신분을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연예인, 또는 ATM기 앞에 선 범죄자, 병원에서 보는 환자 등의 이미지가 있었다면 지금은 세상사람이면 다 하는, 안 하고 밖을 나가면 큰 일나는 것 같은, 마치 속옷과도 같은 이미지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코, 입을 보는 게 낯설고 불편하고 어느 때는 민망하기도 하다.
그 전에 알 수 없었던 코, 입이 사람의 인상에 기여하는 부분이 상당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람들과 눈으로 소통하게 됐다.
사실 예전에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하면 그것도 어른한테면 버릇이 없거나 아님 공격적이다는 이미지 땜에 힘이 좀 있다하면 애들도 "눈 깔어" 했었는데 요즘은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목소리와 눈빛에 의존하다보니 기존의 그런 이미지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눈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휴먼이라는 사람 동물에게 실제 눈빛교환(Eye Contact)은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사람의 감정 교류를 직접적으로 할 수 있고, 좀 더 극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의 애정과 관심어린 눈빛은 고독과 우울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코로나는 우리를 고독하게 했다. 그동안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운동을 하고 혼자 여행을 하면 사회성이 없거나 뭔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독립적인 이미지였다면, 이제는 나의 생명을 지키고 타인의 생명을 지키는 매너있는 행동이 혼밥이고 혼술인 게 되어버렸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침 튀기며 손 안씻고 살았단 말인가? 이제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인사법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침을 뱉는다는 게 마냥 우스겟소리는 아닌 것 같다.
그 만큼 친밀함, 내밀한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좀 더 나아가 생명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침 튀기며 술마시고 떠들고 했던 일들이 가끔은 그리워지기까지하는 얼마나 인간적인 행동이었던가? 지금 누군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매우 불편하다.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조용조용 말하는 게 일상이 되다보니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나 스스로에게 보다 더 집중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고독력'은 이제는 인간 생존 능력이 되었다.
쉽게 말해, 누구나가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따로 또 같이'는 이미 MZ세대, 그 이하세대에게는 당연한 일상이다. 혼자이기에 만남의 소중함을 알게 됐지만, 그래서 얻는 부작용이라면 만남의 민감성도 커지고상처도 커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면 사람에게서 얻는 상처를 또 다른 타인을 통해 치유받겠지만 고독해진 사회에서는 기존에 알던 사람에 대한 의존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SNS상에서 '또 같이'를 추구하지만 이 역시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기대와 함께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